진천송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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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인물(歷代人物)
▶ 송원겸(宋元謙)
진천백(鎭川伯) 휘 인(仁)의 독자로 천성이 영특하고 결백하였으며 지절(志節)이 굳었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시었다. 어려서 부터 아버님의 엄훈(嚴訓)을 익히고 타고난 재질(才質)로 학업에 충실하여 지덕(知德 )을 착실히 닦더니 관계(官界)로 진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어려운 국운(國運)을 바로 잡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벼슬이 은자광록대부삼중대광중서문하평장사상주국태재(銀紫光祿大夫 三重大匡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太宰) 에 이르렀다. 아들 순(恂)과 희(憘)를 두어 출중하게 길러냈다. 묘(墓)는 실전(失傳) 되었으나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에 단비(壇碑)를 세웠으며 시향을 음 10월 10일 현지에서 봉행(奉行)한다.
▶ 송 순(宋 恂)(1200~1259)
원겸(元謙)의 아들로 진천백(鎭川伯) 휘 인(仁)의 손(孫)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읽기를 좋아하시더니 고종 28년(124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일찍이 전첨(典籤)을 지내다. 또한 전례(典禮)에 밝아 이름이 높았고, 벼슬이 참지정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태자소사 중서시랑평장사 (參知政事 集賢殿 太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太子少師 中書侍郞平章事) 에 이르렀으며, 그 후 지공거(知貢擧)에 올랐다. 은퇴하여 시골에 있을 때에도 국가의 전례에는 항상 나아가 자문(諮問)하였다. 고종 46년(1259) 기미(己未)년 7월에 타계하시니 어진 정사와 업적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아들 감찰어사(監察御史) 언기(彦琦)는 열전이 고려사에 있으며 대장군(大將軍) 언상(彦祥:文胄)은 열전이 따로 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 희(宋 憘)
원겸(元謙)의 둘째 아들로 진천백(鎭川伯)의 손(孫)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가훈(家訓)을 잘지키며 부모(父母)의 엄한 교육을 잘 받들어 극공부에 정진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극진히 효봉(孝奉)하면서 가도융창(家道隆昌)을 위하여 힘썼으며 국가발전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벼슬길에 올라 여러관직을 거쳐 봉익대부 전리판사(奉翊大夫典吏判事)에 이르렀고 아들 유의(由義) 유신(由信) 형제를 두시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국첨(宋國瞻)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와 비리를 싫어했고 학문을 즐기더니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감찰어사(直史館監察御史)를 역임하였다. 재임중인 1231년 신묘(辛卯)몽고의 살리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왕제(王弟) 회안공(淮安公)정(挺)과 함께 화의추진(和議推進)에 참여했다. 이후 정언(正言)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있으면서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경상도, 충청도, 순문사(巡問使)로 있다가 동경유수(東京留守),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서북병마사(西北兵馬使)로 근무중 졸(卒)하시니 후사(後嗣)가 업으시나 그 빛나는 업적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언기(宋彦琦)(1204~1247)
고려 중서시랑 평장사(高麗中書侍郞平章事) 휘 순(恂)의 아들로 1204년 진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통하여 1226년 병오(丙午)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현령(全州縣令)이 되어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국민을 다스리고 지방 토호들의 착취를 엄단하므로 군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후 벼슬이 도병마록사(都兵馬祿事)를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여러 지방을 돌았다. 우창(右倉)을 감사(監査)할때 마침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많이 생기자 곡창을 풀어 주민을 구휼(救恤)하니 명어사(名御史)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려 고종 25년(1238)무술(戊戌)에 몽고병이 처들어와 온 나라를 짓밟자 1239년 기해(己亥)에 삭주(朔州), 귀주(龜州) 등지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전후 4차레나 몽고에 다니면서 강화(講和)에 힘썼다. 그 후 벼슬이 예빈소경문하시랑판장작감사(禮賓少卿門下侍郞判將作監事)에 이르렀다. 1246년 병오(丙午)에 왕은 다시 몽고에 강화사로 보내려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병이 들어 못가게 되자 재상들이 말하기를 『송지생(宋之生)은 국지복(國之福)이오, 송지망(宋之亡)은 국지우(國之憂)』라 하였으니 국가에 대한 충성과 공적은 알고도 남으리라. 다음해인 1247년 정미(丁未)에 43세로 타계하시니 조정대신 모두가 슬퍼하였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언상(宋彦祥)
중서시랑(中書侍郞) 휘 순(恂)의 둘째 아들로 자(字)는 문주(文胄)이시며 언기(彦琦)와 형제간으로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였고 어려서 부터 가훈을 익히며 학업에 정진하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으며, 지기(志氣)가 굳건하고 용력(勇力 )이 뛰어났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관계(官界)에 몸을 담아 무관(武官)으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고종 18년(1231)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휘하에 있을 때 몽고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처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성을 사수하고 한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제수되었다. 고종 23년(1236) 9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으로서 몽고병이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종용하거늘 이에 사졸(士卒)을 이끌고 나가 격추시켰다. 이로인해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으며 특히 죽주산성(竹州山城) 싸움이 유명하며 송장군전공령각(宋將軍 戰功靈閣) 충의사(忠義 私祠)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주산성안에 있으며 매년 중양절(重陽節 음9월9일)에 지방유림(地方儒林)에서 봉헌(奉獻)하고 있다.
▶ 송유의(宋由義)
진천백(鎭川伯)의 증손(曾孫)이시며 봉익대부전리판사(奉翊大夫典吏理判事) 희(憘)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智慧)가 뛰어나더니, 충렬왕 5년(1279)에는 안동부사(安東副使 )를 거쳐 벼슬이 예의판사(禮儀判事), 지후(祗候), 광정대부 정당 문학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匡靖大夫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를 역임하시었다. 그러나 후사(後嗣)가 없어 무후(无后)이시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유신(宋由信)
진천백(鎭川伯)의 증손(曾孫)이시며 봉익대부전리판사(奉翊大夫典理判事) 희(憘)의 2남으로 유의(由義)의 아우이시다. 어려서부터 지용(智勇)을 겸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學問)도 깊이 닦았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엮임하고 정순대부밀직사대언 호부랑중합문지후(正順大夫密直司代言 戶部朗中閤門祗候)에 이르렀으며 아들 전(銓)을 두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 전(송 전)
진천백(鎭川伯)의 현손(玄孫)이며 정순대부(正順大夫) 유신(由信)의 독자로 영특한 천성과 온유원만한 성격을 타고 났으며 효심이 두터웠다. 일찍부터 가통(家統))을 귀감(龜鑑)삼아 학구에 열중하더니 자라서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벼슬이 봉의대부 추밀원총랑(奉議大夫樞密院摠郞)에 이르렀다. 아들 지백(之伯)을 두었다. 묘는 실전되어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진천백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
▶ 송지백(宋之伯)
진천백(鎭川伯)의 6세손으로 일찍부터 글읽기를 좋아하더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대문장가가 되더니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투신 여러 요직을 거쳐 광정대부보문각직제학지추밀원사문하첨의찬성사(匡靖大夫寶文閣直提學知樞密院事門下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며 학문과 전례(典禮)에 밝아 국민의 춫앙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시었다. 아들 간의대부한림원사첨의시랑동지봉어동정판부사(諫議大夫翰林院事僉議侍郞同知奉御同正判府事) 징(徵)과 문하평리안성군사(門下評理安城郡事) 소(소), 서령(署令) 림(琳), 봉순대부판전교사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 무(懋) 등 4자를 두었다.
▶ 송 징(宋 徵)
진천백(鎭川伯) 7세손이며 찬성사(贊成事) 지백(之 伯)의 장남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벼슬이 간의대부한림원사 첨의시랑(諫議大夫翰林院事僉議侍郞)에 이르러 국민으로 하여금 많은 추앙을 받았으나 후사(後嗣)가 없으시다. 묘는 실전되었다.
▶ 송 소(송 소)
찬성사(贊成事) 지백(之伯)의 차남으로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아들 광우(匡祐) 전서(典書), 광도(匡度) 정용낭장(精勇郎將), 광보(匡輔) 안성군사(安城郡事) 등 삼형제를 두어 각각 3파(전서공파, 낭장공파, 안성공파)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묘는 진천군 덕산면 옥동리 설암산에 있으며 석축원봉(石築圓封)에 각종 석물이 가추어져 있다. 시향은 매년 음10월 10일에 봉헌(奉獻)한다.
▶ 송 림(宋 琳)
찬성사(贊成事) 지백(之伯)의 3남이며 문하평리(門下評理) 소(소)의 아우로 학문을 깊게 닦아 학덕(學德)으로 이름이 높았다. 관계에 나아가 서령(署令)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가선대부판안변부사(嘉善大夫判安邊府使) 우(愚) 송정공파 중시조(松亭公派 中始祖)를 두었다. 묘는 실전되었다.
▶ 송 무(宋 懋)
찬성사(贊成事) 지백(之伯)의 4남으로 일찍이 관계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친후 봉순대부 판전교사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 에 이르러 많은 치적을 남기시었다. 아들 군수(郡守) 면(勉)을 두었으며 참의공(參議公) 명고(命古)의 증조(曾祖)이시다.
▶ 송광우(宋匡祐)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 참조.
▶ 송광도(宋匡度)
낭장공파(郎將公派) 파조 참조.
▶ 송광보(宋匡輔)
안성공파(安城公派) 파조 참조.
▶ 송 우(宋 愚)
송정공파(松亭公派) 파조 참조.
▶ 송명고(宋命古)
참의공파(參議公派) 파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