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정(玉流亭)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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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정(玉流亭)에 올라

송병혁 0 2968


  무더운 삼복지간(三伏之間) 해거름에 땀을 흘리며 운동으로 올라왔다. 삼청공원 숲속은 시원했는데 말바위를 거쳐 와룡공원, 성균관대학 후문으로 내려오도록 바람 한 점이 없네. 시원한 냉수 한 모금이 절실한데 옥류정(玉流亭)에 이르렀다, 예전엔 침류대(枕流臺)가 있었다지.

  옥같이 맑은 시냇물 흐르는 정자라면서 여기 있는 샘물조차 마실 수가 없으니 그 이름뿐이란 말인가! 4백여 년 전쯤엔 유희경을 따라 올라왔던 지봉(芝峯 李睟光/ 1563-1628)은 신선이 된 양 개울물로 입을 가셨다는데....... 한국 최초로 백과사전적인 지봉유설(芝峯類說)을 펴낸 명사(名士) 말이다.

  바로 위로 마을버스 정류장이 만들어진 작은 계곡엔 그 옛 매력은 사라졌네.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노비의 신분이라 제약도 많았던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1545-1636)이 여기에 돌로 쌓은 대(臺) 위에다 작은 집을 짓고 침류대(枕流臺)라 불렀다. 그의 인품과 문학(文學)이 뛰어나서 당대의 명유(名儒)들이 함께 찾아와 이 숲속에서 시를 읊었던 곳이다.

  아마도 우리 진송(鎭宋)의 표옹공(瓢翁公 宋英耈/ 1556-1620)도 한번쯤 이리로 올랐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동시대에 여러 친구들이 왔었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지봉 이수광이 표옹의 장례에 보낸 만사(輓詞)를 보더라도 서로 친분이 깊었음이 확실하다. “어려운 때에 견디며 홀로 깨었고(憂時耐獨醒), 정승 반열의 관리 한 분 나왔는데(一官纔列宰)” 하늘이 무정하다고 안타까워했었다.

  표옹유고(瓢翁遺稿)에도 있는 ‘동포십육경(東浦十六景)’의 긴 시는 똑 같은 내용으로 읊었던 백암(栢巖 金玏/ 1540-1616) 역시 여기에 왔었다니까. 그 시를 지었던 1599년은 표옹공이 충청도사로 나갔고, 백암은 충청도관찰사여서 직속 상하관계가 아니었나.

  더구나 여기서 어울렸다는 허균(許筠) 형제, 이정구(李廷龜),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 등이 모두 표옹과 깊은 관계의 친구들이었다. 여기 유희경과 함께 모였던 당시의 여러 인사들은 사상이 서로 통하였고, 표옹공의 시문에 나타난 뜻과도 상통함을 볼 수있다.

  특별히 광해군 혼조기(混朝期)에 천한 신분의 사람인 유희경 같은 이들을 포함하여 사대부들이며 글을 짓는 소객(騷客)들이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상적인 꿈을 꾸면서 마음속의 뜻을 토로(吐露)하고 창화(唱和)하며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희경이 이곳에 살면서부터였다.

  이수광이 처음 중국을 다녀와서 소개한 양명학(陽明學)을 여기서 논하였고, 당파를 초월하였으며 노장(老莊)과 유불선(儒彿仙)을 망라하여 토론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드러내지는 않았으니 은자들의 개혁사상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것이 후대의 실학(實學)이라는 개념과 일치한 것이었다.

  이를 본 따서 후대의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宋浚吉/ 1606-1672), 김수항(金壽恒/ 1629-1689) 같은 이들도 도봉산 계곡으로 옮겨가서 침류대의 흔적을 돌에 새겼으니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이같이 이 계곡의 침류대의 흐름은 보다 멀리 퍼졌던 것 같다. 나도 오늘 그 옛날을 되새겨 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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