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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원(淵源)

  진천백(鎭川伯) 휘(諱) 인(仁)의 칠세손(七世孫)이며 문하평리공(門下評理公) 소(소)의 이남(二男)으로 휘(諱)는 광도(匡度)로 재질(才質)이 뛰어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문무(文武)를 깊게 닦아 무관(武官)으로 나아가서 비순위정용낭장(備巡衛精勇郎將)에 이르렀다. 공(公)께서는 사람의 도리(道理)를 충(忠)과 효(孝)에 근원(根源)한다고 하시었으며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그의 효행(孝行)이 국내(國內)는 물론 중국(中國)의 천자(天子)에 까지 알려져 크게 감탄(感歎)한 나머지 후세(後世)의 귀감(龜鑑)이 되도록 정려(旌閭)를 세울 것을 명(命)하기도 하였다. 나라에서 오륜(五倫) 삼강(三綱) 중에 으뜸인 효행(孝行)에 대해서 본보기를 삼고자하여 각 향읍(鄕邑)에 추천을 받아 왕께서 칭선(稱善) 효도하는 집안 중에도 가장 으뜸이라는 표문을 당시 중국(中國) 천자(天子)에게 상소하자 이에 기꺼이 효행 정려(旌閭)를 세워 주어서 동방(東邦)의 나라 후손들로 하여금 만대(萬代)에 귀감이 되도록 하명되자 공(公)은 겸손하여 극구 사양하는 소문(訴文)을 수차에 걸쳐 올렸으나 더욱 감탄하여 당시 동국은 물론 중국천하에서도 으뜸이 될 만한 효자로 추앙되었음을 알 수 있도다.  충북(忠北) 음성군(陰城郡) 맹동면(孟洞面) 두성리(斗城里)에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많은 자손들이 이를 보호하며 살고 있다. 묘는 휘(諱) 소(?)묘 하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석축방봉(石築方封)에 석물(石物)이 갖추어 있으며 시향(時享)은 음(陰)10월(月)11일(日) 봉헌(奉獻)하고 있다. 낭장공파(郎將公派) 중시조(中始祖)이시다. 낭장공파 후손(後孫) 관식(寬植) 은식(殷植) 병오(炳五) 장관리 문중(長官里 門中)등 찬조금을 모아 낭장공 재실(齋室)을 건립하였으며 진천백(鎭川伯)산하 묘하에 낭장공파 후손이 진천군 음성군에 거주하며 800년간 묘소관리를 하였다.  


 


 

● 역대인물록(歷代人物錄)
    ✻(  )속의 숫자는 인(仁)자 할아버지(貫鄕祖)를 1世로 함.

■ 광도 (匡度) 8세(世) 낭장공파 파조(郎將公派 派祖)
   문하평리공(門下評理公 소(玿)의 이남으로 재질(才質)이 뛰어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일찌기 문무(文武)를 깊게 닦아 무관(武官)으로 나아가서 비순위정용낭장(備巡衛精勇郎將)에 이르렀다. 공(公)께서는 사람의 도리(道理)를 충(忠)과 효(孝)에 근원(根源)한다고 하시었으며, 부모(父母)에 대(對)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그의 효행(孝行)이 국내(國內)는 물론 중국(中國)의 천자(天子)에까지 알려져 크게 감탄(感嘆)한 나머지 후세(後世)의 구감(龜鑑)이 되도록 정려(旌閭)를 세울 것을 명(命)하기도 하였다. 충북(忠北) 음성군(陰城郡) 맹동면(孟洞面) 두성리(斗城里)에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많은 자손(子孫)들이 이를 보호(保護)하며 살고 있다. 묘(墓)는 부(父) 소 묘(소 墓) 하단(下段)에 자리하고 있으며 석춧방봉(石築方封)에 석물(石物)이 갖추어 있으며 시향(時享)은 매 시월(每 十月) 십일일(十一日) 봉헌(奉獻)하고 있다. 낭장공파(郎將公派)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 저 (儲) 9세(世) 
    서기(西紀) 1445년 을축문과(乙丑文科) (세종(世宗) 27년) 사인력지중직대부사재감정(舍人歷至中直大夫司宰監正) 

■ 부 (傅) 9세(世) 
     전직(殿直)


■ 수 (脩) 9세(世)

     교수(敎授)

■ 한 (한) 9세(世) 

     진무부위종사랑참봉(進武副尉從仕郞參奉)

■ 석동 (石仝) 9세(世)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인군수(舍人郡守)를 역임하고 서기(西紀) 1456년 병자(丙子)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端宗)의 복위모의(復位謨議)에 참여하였다가 발각되어 공(公)의 부친(父親) 저(儲)와 아들삼형제(三兄弟) (창녕안(昌寧安))와 함께 참화(慘禍)을 입고 죽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이 후에 장릉지(莊陵誌)에서 발견(發見)되자 시임예조판서(時任禮曹判書) 이도중(李到中)이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해 주도록 계청(啓請)한바 있었다.동학사혼기(東鶴寺魂記) 장릉지(莊陵誌)에 수록(收錄)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