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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0-02 (화) 19:55
ㆍ조회: 2876  
  2.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신공왕후는 누구인가?)
 
228번과 같은 내용 입니다.
그런데, 먼저 작성한 내용이 반쪽만 나오고, 수정과 삭제가 되지않아, 다시 작성 합니다.
홈페이지 관리자님... 이곳 홈페이지를 사용하다 보면, 알수없는 문제들로 불편한 점들이 많습니다... 잘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글에서 일본서기에 임나에 대한 기록은 일본10대 국왕 숭신 (스진, 65년,기원전 33년)에 처음 소개 된것을 확인 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여기에서 더 진화하여 신라와 백제, 고구려를 정벌하고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임나를 경영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임나는 우리 삼국사기의 6개 가야국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우리 삼국사기는 물론 제3국인 중국의 사서에도 없다.
중국의 사서는 대체로 자국의 역사 뿐 아니라, 주변의 교역국의 나라 이름과 강역 위치까지 세밀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는데, 중국 사서에 조차 그런 내용은 없어, 대체로 한국과 중국 사학계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가 얼마나 치밀하고 자세하게 쓰여져 있는지, 우리 삼국사기 만으로는 임라일본부를 완전히 뒤업기가 어렵다고 한다.
신라 왕실은 통일 이후에 백제와 고구려의 고서를 수집하여 새로 정리하지 않고, 더욱이 자국인 신라 역사의 기록마저 허술하게 하였는지 아쉬운 부분이다.

지난 글에 밝혔 듯이.. 우리 삼국사기는 그냥 사신을 보냈다... 어디에서 사신이 왔다... 이정도 인데,
일본서기의 경우 사신의 이름과 조공 물건,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그런 내용까지 세밀하게 적어놓은 부분이 많다. 심지어 삼국사기에는 신라에서 보낸 사신의 이름이 조차 없는데, 일본의 경우 그 사신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참 놀랍기 마저 하다.
그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놓고 시름을 하면,,, 삼국사기의 내용이 빈약하여 기가 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건설 시기를 알아보자.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왕후 (진구여왕, 재위 200-270년)가 신의 계시를 받아,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그에 앞서 일본은 임나를 건설하기 이전에 신라를 정벌하는데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神功皇后 9년 겨울 10월(200년 음10월 3일)
겨울 10월 己亥 초하루 辛丑 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 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神國이 있는데 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 圖籍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飼部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阿利那禮河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 이에 신라왕 波沙寐錦은 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金銀·彩色綾羅·縑絹을 배 80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高麗와 百濟의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위 와 같다...


[신라왕에게 항복을 받는 신공왕후 -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만화에 불과하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신라를 공략하자, 신라왕이 겁을 먹고 신국의 천왕에게 감히 대적 할수 없다며, 해가 서쪽에뜨고, 강물이 거꾸로 흐르며, 냇돌이 별이 되지 않는한, 조공을 받치겠다며 영원한 항복을 맹세하고, 이를 지켜본 백제와 고구려도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내용을 보면 전쟁에 의한 정복한 것이 아니라, 도술에 의한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데 물고기 떼를 모아 건너고, 한편 전쟁을 하는데 창과 칼로 하는게 아니라, 도술로 바닷물을 신라 왕성까지 채워서 신라왕이 겁을 먹고 항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 될지 모르겠다.
일본서기의 이런 부분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중 하나이다.
위 내용을 보면 주몽의 건국 설화를 보는 듯 하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남부여로 향하는데, 강가에서 길이 막혔다. 이에 주몽이 나는 해신의 아들이요, 내 어머니는 화백의 딸이다. 라며 주문을 외우자, 거북이와 물고기 떼가 강을 메워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바닷가를 건너며 물고기 떼를 모아서 건넜다는 것은 주몽설화와 비슷하다.
일본서기는 백제본기, 백제기, 백제신찬을 참고하여 만들었는데, 백제의 시조는 주몽의 아들 온조이다. 따라서 백제3대 사서에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설화가 수록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이 그 내용을 변형시켜 일본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임나일본부는 사실 위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신공왕후를 신성화 위해, 설화식으로 만들어 서두에 끼워 넣은 것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신공왕후 49년 3월 (249년 음 3월)에 있다.

일본서기 神功皇后 49년 봄 3월(249년 음3월)
新羅의 격파와 7國의 평정. 百濟와의 우호(千熊長彦과 百濟王의 맹세)

49년 봄 3월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沙白·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에게 <일본서기 주해 : 이 두 사람은 그 姓을 모르는데 다만 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精兵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比利·辟中·布彌支·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父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이 意流村 <일본서기 주해 : 지금은 州流須祇라 한다> 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 년 만 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문장의 중간 <....> 표시 부분은 일본서기에 쓰여있는 해설이다. 일본서기는 중간에 이런 주해가 있다.


[군사를 일으켜 신라, 임나 7국, 침미다례를 정복한 신공왕후]
일본서기에 그녀는 응신왕을 임신한 상태에서, 아랫 배에 돌을 묶고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만화이다.

신공왕후가 재위9년 (200년)에 신라를 1차 정벌 후, 재위 49년 (249년)에 신라를 2차 정벌하고, 그 주위에 있는 7개 가야와, 침미다례 (제주도를 뜻함)를 정벌하여 침미다례는 백제에게 주고, 나머지 7개 가야는 일본이 지배 했다는 내용이다.
이때, 백제는 일본 편으로 장군 목라근자가 그 전쟁에 직접 참여 하였으며, 백제의 초고왕 (근초고왕)과 귀수왕자가 일본을 후원하였다는 것이다. 목라근자의 후손이 목만지 인데, 목만지 또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공통으로 보인다. 일본서기는 목협만치라고 하고있다. 한편 久氏가 보이는데 이 사람도 백제 사람이다.

위 내용은 지명도 기재되어 있고, 비교적 신라 1차 정벌 때보다는 사실감이 있다. 그런데, 저 당시에 과연 짧은 기간 동안 일본에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의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 7개국을 정벌한 후, 또 다시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정벌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저 정도의 국력이면, 대단한 해군력을 지녔다는 것인데, 사실 오늘 날의 일본영역은 불과 150년전 메이지 유신 1853-1877년 (명치왕) 이후 1895년 청일전쟁 때 형성되었다.
메이지 유신 때만 하더라도 일본 열도에는 일본 왕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현에 尙氏들에 의한 류큐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고, 대마도의 경우도 宗氏들에 의한 왕조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왕조들은 우리 조선왕조가 일본에 병합되었듯, 일본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못 하고 일본화가 된 것이다. 이 당시 류큐 왕조는 우리 조선 고종이 그러했듯이,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죄로 류큐왕조의 왕이 일본의 명치 (메이지)왕에게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1700년전 바다를 건너 짦은 기간에 저렇게 영토확장 전쟁을 한다는 것은 좀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든다.

잠시 화제를 돌려 우리 국사 교과서는 백제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절이 최고의 전성기 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위 왕들에 대한 내용이 별로없다. 다만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 사실만으로 최고의 최성기 였다고 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 역사 교과서는 근초고왕 시절에 백제가 한반도 남부까지 영토확장을 하였다고 하나,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백제 근초고왕의 한반도 남해안 영토확장은 일본서기에 의해 밝혀진다.
그래서, 우리 사학계 중 일부는 임나정벌과 경영의 주체는 일본이 아니고, 사실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업적인데, 일본이 그것을 차용해 갔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위에서 보면 일본은 신라를 정복하고 임나 7국 및 침미다례를 정벌하는데, 백제는 그들의 침략 대상이 아닌 협력군이며, 백제 장군 목라근자와 구씨가 함께 정복 활동을 하고, 더욱이 전쟁이 끝난 후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제사를 주도하고 있다. 물론 일본서기는 백제와 임나가 일본천황에 대한 맹세서약식 이다 하였지만, 이것은 맹세서약식이 아니라 전쟁에 승리한 후, 하늘에 감사드리는 제사인데, 일본서기가 이를 일본왕실을 향한 충성맹세로 둔갑 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4세기 중반 한반도의 임나 경영의 주체는 백제 였는데, 백제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서기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며, 백제 왕의 업적을 일본 왕의 업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삼국사기는 백제의 성장기를 밝혀두지 않아 이런 내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않다.

한편 임나 건설의 주체가 백제인데, 일본에서 차용했다는 의구점은 일본서기 웅략왕조에도 보인다.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백제 한성이 정벌되며, 개로왕이 전사하고 임나 (가야)는 점차 신라쪽으로 흡수되어 간다. 이때 일본서기는 일본 국왕이 백제 성왕에게 교지를 내려 임나를 건설하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일본왕은 교서만 내리고 교서의 내용도 없으며, 모든 일처리는 백제 성왕이 주도한다. (이것은 별도로 나중에 설명하도록 한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건설의 그 주체는 일본이 아니고 백제 였다고 예상되는데, 우리 삼국사기는 백제본기에 백제의 증흥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아, 뒷받침해 줄 증거가 없다.
이 때문에 간혹 김부식이 신라왕실 출신이라 백제사를 깍아내린 것 아니냐고 욕을 먹는데, 사실 이것은 김부식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왕실은 백제사와 고구려사를 새롭게 정리하지 않고 방치하여, 옛 고서들이 유실된 탓이다.

신공왕후 기사에는 임나 7개국의 이름이 쓰여 있으나 훗날 이 임나가 더 늘어난다.
흠명왕 (킨메이, 재위 539-571년) 23년 봄 정월조에 의하면, “통털어 말하면 임나라 하고, 따로 말하면 加羅國·安羅國·斯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湌國·稔禮國이니 합하면 10국이다” 이라고 하여, 신공왕후 시절 7개국 이었던 임나가 흠명왕 시절이 되면 10개국으로 늘어난다.

우리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는 6개국으로 한정 되는데, 가야부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보다 일본서기가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소국은 병합되기도 하고, 새로 생성되기도 하는데, 일본서기는 이런 부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 것이다.
일본서기가 자국 중심의 사관에 자만하여, 내용들이 허무맹랑하나, 이런 세밀한 부분은 놀랍기 마저하다. 이것은 자신의 역사를 쓰며 과대포장한 부분이 소설에 끝나지 않고, 사실감을 불어넣기 위해 수 많은 고서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일본화 시킨 노력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 신라인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백제 태자비나 겁탈하고, 정복민을 끌어다 노동력을 탄압하여 연못 (안압지)을 만들고, 종이 배나 띄우며, 술 마시고, 주사위 굴리며 노래나 부르다.. 태평세월이 다가오자, 왕족간에 왕좌에 눈이 멀어 왕위쟁탈전만 부렸다. 그러다 진성여왕 시절이 되면 온갖 퇴폐가 왕실까지 난입하고, 계속되는 왕족간의 왕권다툼에 지방 인심이 멀어져, 왕실 방계귀족과 전국의 호족이 봉기하는 춘추전국 시대와 후삼국 시대가 온 것이다. 신라왕실은 670년-935년에 이르는 황금의 시대에 이렇다할 역사 책 하나 만들어 놓지않아, 불과 그 나라가 사라지고 210년 만에 더욱이 그 왕실 후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정리하는데, 자료가 빈약하고 유실된 것이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불만아닌 불만을 써놓은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이곳에서 끝나지 않고, 1천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은 일본서기를 내세워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데, 우리의 삼국사기는 그것을 뒤집을 만한 내용이 빈약하여 쩔쩔매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거짓은 진실만으로 뒤집을 수 없다... 진실된 내용이 거짓보다 자세하고 세밀하면, 거짓을 쉽게 뒤집을 수 있으나, 오히려 거짓쪽이 더 세밀하고, 진실쪽의 자료가 빈약하다면, 그것을 뒤집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신공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신공왕후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일본서기에 200-270년까지 섭정왕후로 여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일본국왕 14대 중애왕 (쥬아이, 재위 192-200년)으로 8년간 재위하나, 그녀의 남편은 임나를 건설하라는 신의 계시를 거부했다가 신의 미움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재위기간 70년, 남편의 재위기간 8년만 합치더라도 78년이 되며, 남편이 죽기전에 아들 응신을 임신 하였으니, 대략 20세를 합하면 100살 가까이 살았다. (그러나 우리 삼국사기와 비교하면 310년을 살았다.)
또한 그녀의 아들 응신왕의 경우 재위 270-310년이다. 그가 200년에 태어났다고 했으니, 응신왕의 경우 110살을 살았고, 그녀의 손자 인덕왕은 145년을 살았다. 이런 것이 일본서기의 단점이며, 그래서 조작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 삼국사기도 백제본기를 보면, 초창기 왕중에150살 심지어 200살을 살았다는 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왕들의 나이가 잘못된 것은 선대왕과의 촌수를 잘못 기입하여 생겨난 오류이다. 즉, 선왕의 동생이나 사촌 또는 오촌 관계인데, 잘못 기록하여 선왕의 작은 증조부나 작은 조부로 잘못 기록한 탓에 150살 250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 일본서기 처럼 재위 기간이 과장되어 이렇게 불가능한 수명이 나온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왕들의 재위기간을 비정상적으로 늘려놓고, 왕의 업적까지 실날하게 써놓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조작의 냄새가 많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일본서기를 분석하면 응신왕은 그 아비가 죽고 15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런데, 신공왕후는 남편이 죽고 응신을 임신한 상태에서 신라를 정벌하는데, 이때 아랫배에 돌을 묶어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태중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칼이나 화살로 부터 태중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제는 15개월 만에 응신이 태어났는데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오늘 날 사람들은 응신이 중애왕의 혈통이 아니라, 아비를 모르는 사생아가 아닌가 추측도 있다.
즉, 신공왕후는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죽자,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진 나머지, 허위로 임신 했다는 소문을 내며,,, 아랫 배에 돌을 묶어 배를 불리게 하였고,,, 몰래 다른 남자와 사통을 하여 임신한 관계로 응신은 그 아비가 죽고 15개월 만에 태어난 것이 아니냐.. 라는 추즉도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설에 불과하다. 옛 기록이 실수하여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 응신왕이 일본 고대의 초대 국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런 그의 탄생배경은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또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아비가 죽고 15개월만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당시 사관의 계산 실수로 볼수 있지만, 이것은 무엇인가 암시하는 복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잠시, 중국 사서를 보면 응신 이전부터 일본에도 100여개 소국이 있고, 그 중에는 왕의 이름도 간혹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왕조가 기원전 660년부터 통일왕조가 시작되었고, 그 혈통이 계속 왕조를 유지했다고 기술 하는데, 정작 일본서기에 있는 초대 왕들은 중국사서에 그 이름이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아비가 죽고 15개월만에 태어났다는 응신왕은 훗날 통일왕조를 건설하는 새왕국의 시조 였다는 것을 암시하는지 모른다. 즉 응신에 의해서 옛 전통왕조가 깨지고 새로운 혈통의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시한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지난 글에 일본서기의 신공왕후와 응신왕 기사는 120년 상향되어 있다고 2주갑자인상설을 소개 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신공왕후를 알기위해서는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살펴보아야 한다.
<위지 왜인전>에는 <히미코> 라는 왜의 여왕이 나오는데 그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07년 왜의 면토국왕(面土國王)이 조공했다. 서기 180년 무렵 왜국에 대란이 일어나 그 난리 속에서 30여개 소국들의 공립으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가 왕이 되었다. 239년 히미코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하였다. 구나국와 대립하고 있던 히미코는 240, 243년 위나라에 사자를 보내와 원조를 요청했다.

또한 <위지 왜인전>은 그녀가 서기 249년에 사망했다.


그럼 일본서기를 살펴보자.

일본서기 신공왕후 39년 (서기 238년): 이해의 太歲는 기미년이다. 위서에 말하였다. 명제 3년에 왜의 여왕 비미호가 대부 난두미 등을 보내어 천자를 알현할 것을 요구하고, 조공하였다.

신공 40년 (서기 240년) 위지에 말하였다. 정치 원년 위제왕이 조서와 인수를 왜에 보냈다.

신공 43년 (서기 243년) 위지에 말하였다. 왜왕이 다시 사자 8인들을 보내 헌상 하였다.


위 내용은 신공왕후가 위서에 보이는 왜 여왕 비미호라며 일본서기가 중국의 <위서>를 인용하여 기록한 내용이다. 즉 신공왕후 = 비미호가 된다.

그런데, 이 비미호는 우리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 아달라왕 시절 (서기 174년) 왜 여왕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서기 174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238년과 243년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249년에 사망한 것을 보면, 왜왕 비미호는 고대시절 이라는 시간을 감안하여 상당히 장수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은 그 동안 일본서기가 정확하게 기록되었고, 삼국사기 신라 아달라왕 본기에도 보이고, 중국의 위지에도 보이니, 실존하는 인물이며, 따라서 신공왕후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임나를 건설했다는 것은 사실이다고 주장 하였다. 이것만 보면 신공왕후는 일본서기 뿐 아니라, 우리 삼국사기, 중국 위서에 의해 그 가치가 증명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공왕후 기사를 보면, 백제 왕실의 내용까지 자세히 수록 하였는데,여기에서 그들이 그만 실수를 하고 만다.

신공왕후 55년 (서기 255년) 백제의 초고왕 (근초고왕)이 죽었다

56년 (서기 256년) 초고왕의 아들 귀수왕(근구수왕)이 재위에 올랐다.

64년 (서기 264년) 백제의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 침류가 왕에 올랐다.

65년 (서기 265년)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는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여기에서 아화는 훗날 아신왕 이며,,, 진사는 침류왕의 동생 진사왕을 뜻 한다.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375년에 붕어했고, 근구수왕은 384년에 붕어 했으며,

침류왕은 385년에 붕어 하였다.

연대를 비교해 보면 일본서기의 신공왕후는 120년 앞당겨져 있다.

물론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연대가 서로 맞지 않으나, 후대로 가면 비슷해져 가는 시점이 있는데,

일본서기의 웅략왕 (유라쿠, 456-479년) 이후부터는 삼국사기와 대체로 연대가 일치한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연대를 비교하는 기준은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 덕분이다.

백제 무령왕의 경우 일본서기에도 그 붕어 날짜가 나오는데, 우리 삼국사기와 연대가 1년의 오차가

있을 뿐 거의 일치한다.

한편 우리 삼국사기는 무령왕의 출생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충남 공주에 위치한 왕릉의 지석에 의해 출생연대까지 알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서기가 우리 삼국사국 사기에 없는 무령왕의 출생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왕릉의 지석에 쓰여진 연도와 일치한다.

여기에서 우리 삼국사기는 무령왕의 실제 사망연도와 1년의 오차가 있었는데,일본서기의 초반부가 기년도 엉터리이고, 더욱이 그 내용도 과대포장 되어, 위작의 소지가 많지만, 우리 삼국사기에는 모르는 무령왕의 출생 연도를 정확히 수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면도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 수록된 무령왕의 탄생 이야기는 다음 글에 소개토록 하고,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출생과 사망날짜를 기록하고, 삼국사기가 무령왕의 출생날짜를 기록 했으며, 한편 무령왕릉의 지석이 출토되어 무령왕의 출생 날짜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시간적 지표가 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비교하면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기사는 삼국사기 보다 120년 앞당겨져 있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신공왕후로 넘어와서,

일본은 신공왕후가 중국 위서와 삼국사기 신라 아달라 본기에 보이니, 실존 인물이며, 따라서 임나일본부가 신공왕후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도 사실 이다고 하였으나,

우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왕들의 사망과 재위 연대 때문에 신공왕후는 120년 상향된 인물이고,

따라서, 실존 인물이 아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신공왕후는 우리 삼국사기를 비교할 때 서기 390년 이후까지 살았는데, 그녀가 만약 우리 삼국사기 신라 아달라 본기와 중국의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보이는 왜 여왕 비미호의 수명은 최소 220년을 살았던 것으로 된다.

위서는 서기 240년의 비미호가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삼국사기는 서기 174년에 비미호가 신라 사신을 보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려 220년 이상을 살았다는 것이된다. 그래서 일본서기가 조작되었고, 조작된 인물에 의해 일나일본부를 주장하는 것은 허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일본은 그 당시 사관의 실수한 것에 불과하다고 변명하겠지만.


그럼 일본서기는 어째서 가공인물 신공왕후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중국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비미호를 현재 천왕가문의 어머니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그래야, 기원전 660년부터 내려왔다는 일본 왕가의 기록에 조금이나마 증거가 될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의 백제 개국설화가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분석하면 백제 시조 온조의 혈통은 2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 시조 주몽의 친자.

둘째, 우태와 소서노의 아들이나, 우태가 일찍 죽고, 모친 소서노가 주몽에게 재가, 즉 우태의 친자, 주몽의 양자이다.

주몽의 고구려 창업은 처가 (소서노)의 공로가 컸다. 그러나 주몽은 그 왕위를 온조에게 물려주지않고, 북부여에서 예씨부인 사이에 낳았던 유리가 돌아오자, 유리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이에 온조의 모친 (소서노)는 불만을 품고,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 보면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 여왕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백제의 3대 고서를 참고하여 저술 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서기가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 학자에 의해 써졌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백제의 개국 여왕 소서노를 일본서기에 차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신공왕후는 남편 중애왕 (쥬아이)가 죽고, 15개월만에 중애왕의 아들 응신왕을 낳았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 자신이 선왕의 아들을 임신했다며 아랫 배에 돌을 묶어 배를 불리웠다.

이것은 중애왕의 혈통이 아닌 사생아를 의미할 수 있으며, 또한 일본 왕실의 새로운 혈통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그 노력은 여왕 신공왕후의 공로였던 것이다.

즉, 백제의 시조 온조 어머니 소서노가 그러했듯이... 일본의 신공왕후도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신공왕후와 응신 출생은 백제의 시조 온조와 소서노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가 신공왕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나, 그 기년이 120년 상향되어 시간적으로 맞지않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한편 역사는 기년이 생명인데, 기년을 속인 사서는 그 내용의 가치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신공왕후 이후의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에 대한 내용을 소개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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