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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0-02 (화) 15:53
ㆍ조회: 2163  
  1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일본국왕은 언제부터 실존 인물인가?)
우리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 (서기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우리나라 현존 최고 역사서 이며, 일연의 삼국유사와 함께 고대왕국을 볼수있는 사서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기원전 57년) 부터 935년 왕건에 의한 고려 통일까지 수록되어 있는 총50권의 기전체 사서로, 기전체는 본기 (제후는 세가이다), 열전, 지, 표 방식으로 기술 하는데, 본기나 세가는 왕실에 대한 기록이며, 열전은 신하 등 개인에 대한 기록이다.
본기의 (기), 열전의 (전)이 중심이 된다고 하여 기전체라 부른다.

한편, 일본에는 고대왕국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서로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3대 사서가 있다.
이에 앞서 680년경에 태안만려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후손)에 의해 고사기가 쓰여졌는데, 이 고사기는 역사서라기 보다는 신화적 이야기에 가깝고, 왕실의 가계를 밝혀놓은 책이다.
[일본서기]는 720년경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총30권 사서로, 기원전 660년부터 서기 693년까지의 일본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대부분의 역사서는 서문이 수록되어, 사서를 편찬하게된 배경과 저자가 밝혀져 있는데, 일본서기는 서문이 없어, 정확한 발간연대와 저자를 알수 없다고 한다.
다만. 680년경에 천무(텐무)왕의 명으로 왕족 노리네친왕이 720년경에 만들었을 것이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예전에는 일본에서 태안만려가 만들었을 것이다고 추정하였으나, 최근 한일 감정에 의한 자존심 때문인지, 노리네친왕이 만들었다고 추정내용을 바꾼 것이다.
[속일본기]는 스가노노 마미치 외1명이 완성한 사서로 679-791년의 일본역사를 총40권으로 편찬 하였다.
[일본후기]는 후지와라 노우쓰구가 840년에 완성한 사서로 792-833년의 일본역사를 총40권으로 편찬 하였으나. 대다수 분실하고 현재 10권이 전한다.

우리 삼국사기는 기와 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전체 사서인데, 일본사서는 년, 월, 일 시간순서대로 기술하는 편년체 사서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통일왕조를 이룩하거나, 새왕조를 창조하면, 정복지나 이전 왕조에 대한 역사서를 편찬해준 사례가 많다. 이것은, 자신의 새왕조의 정당성을 세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옛 기록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인간의 문화적 보호 본능에 의한 것이었다. 그 예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이전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를 정리하여 <삼국사기>를 만들었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470년 역사를 정리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만들었다.

한편, 중국의 경우도 새왕조를 세우거나 이웃 나라를 정복하여 통일국가를 이룩하면, 반드시 주변국의 역사를 새로 정리해 주었다. 심지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먼곳의 소국까지 자신의 역사책에 기록해 두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나라의 수명이 짧은 나라가 백제 (대략 700년)이고, 중국은 가장 길었던 나라가 송나라 (200년) 인데, 역사서 기록내용을 보면... 그 분량의 차이가 중국쪽이 훨씬 많다.
이것은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우리 삼국통일의 주역 이었던, 신라왕실이 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새로 정리하여 보관하는 작업을 소홀하고 기록을 좀 등한시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사기 서문에 보면 김부식은 아래와 같이 밝혔다.
고기 (우리나라에 있는 옛 기록)는 글이 거칠고, 졸렬하고, 사적의 유류가 많아.... 이로써 후세에 권계를 보이지 못 하였으니... 라고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 우리 역사 자료가 부족하고, 분실한 부분이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표출하고 있다.
백제는 660년,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사라졌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1145년에 쓰여졌으니, 백제나 고구려는 470년만에 나라 일이 새로 기록되고, 신라는 불과 210년 만에 새로 기록되는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전쟁으로 망하여 화재나 분실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라의 경우 이렇다할 외세 침략도 없었고, 더욱이 왕건은 신라 왕족을 우대하여 경순왕 (김부)를 국부로 대접 하였다.
그러나, 신라왕실의 후손되는 김부식이 불과 210년 만에 그 나라 역사를 다시 정리하여 쓰고자 하는데, 자료가 부족하고 유실된 것이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신라 왕실의 사관과 보관능력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통일 이후 초기에 신라왕실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억압적인 정책은 고대 사서의 유실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신라가 660년 백제를 정벌하며, 무열왕 (김춘추)는 지난 원수를 값는다며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에서 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을 죽인사실), 자신이 백제 왕좌에 당나라 소정방과 나란히 앉고, 의자왕은 단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술잔을 따르도록 모욕을 주었다. 위 광경을 지켜 본 백제의 백관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또한 신라 태자 김법민 (훗날 문무왕)은 원수를 값는다며, 백제 태자 융을 땅에 무릎꿇게 하고,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인 일로 원한이 맺혔는데, 너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렸다"며 얼굴에 침을 뱉고 모욕을 주었다. 더욱이 백제 태자 비를 빼앗아 한 달 동안 그 몸을 가지고 놀은 후, 다시 돌려 주었는데, 이로써 백제 태자가 그 여인을 소박하자, 김법민은 "감히 성은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화를 내었다고 한다.

668년 고구려를 정벌한 후, 당나라 설인귀가 고구려 왕실 서고에 수많은 책을 보며, "소국에 왠 책이 이렇게 많느냐"며 생떼를 부리며 서고를 불사르도록 하였다.
한편, 신라 문무왕은 670년 고구려와 백제의 기술자들을 경주로 끌고와 그곳에 연못을 만들게 하고, 안압지에서 통일 공신들과 몇 일 동안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신라의 역사는 이곳 안압지에서 끝내 모욕의 수난을 당한다. 후삼국 시절 후백제 견훤이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안압지에서 왕비의 몸을 가지고 놀았다.
지난 시절 김법민이 백제 태자비의 몸을 강제로 빼앗가 가지고 놀았던 것을 견훤이 그대로 따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모습에 초기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신라의 무단통치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유민들은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은 [백제기] [백제신찬][백제본기]등 백제의 옛 사서를 들고, 일본에 들어갔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왕실의 내용까지 수록하고, 또한 고구려 내부 사정도 일부 기재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 3대 사서]와 [위서] [진서]의 내용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서기는 시간과 내용에서 오류가 있고, 과장된 것이 많다. 그래서 기록물로써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위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상당히 세밀하고 자세한 부분도 있다.
중간에 보면 <백제기>에 의하면 0000 라고 한다. <백제신찬>에 의하면 000라고 한다... 라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백제 왕들의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까지 밝히고 있으며, 사신이 거래하며 가져온 물건과 그 사신의 이름도 수록하고, 그 사신이 어떤 내용을 전달했는지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는 아쉽게도 사신을 파견했다. 라고만 되어있지, 사신의 이름조차 없다.
그렇다고, 일본서기가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훌륭한 것은 아니다.
위작이라 역사적 가치는 많이 떨이지만, 다만 내용이 상당이 많고, 세밀하고 자세한 부분까지 써 놓은 것은 대단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시간적 흐름을 요약해 놓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반면 일본서기는 어떤 사건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해 둔 것을 보면, 참 부러울 정도의 생각이 든다.

하나의 예로 삼국사기 백제 본기를 보면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래서 백제가 남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신라는 북한강 유역에 진출한다.
이것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백제의 서울 한성이 고구려에 넘어갔는데, 이에 백제 성왕이 한성을 회복하고자 신라 진흥왕과 함께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략한 것이다.
이때 우리 삼국사기를 보면 성왕이 한강유역까지 회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를 보면 성왕이 한강유역만 회복한 것이 아니고, 백제의 옛 서울 한성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더욱이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략하여 취한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잠시 화제를 돌려 추측 가능한 것은 고구려 초반기 서울은 졸본지역이나 국내성 이다. 그런데 장수왕 이후 서울을 함경남도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주에도 평양이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 사이에는 고구려의 서울은 만주의 북평양, 한반도의 남평양 2개였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본서기의 내용을 보자면, 북평양 남평양 2개 서울 이론도 가능할 듯 하다.
만약, 고구려의 수도가 남평양 1곳 이었다면, 고구려는 백제 성왕에 의해 끝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고구려왕이 도망했다거나 죽었다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고구려의 북평양, 남평양 2개 서울론도 어느 정도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는 백제 성왕이 한강유역까지 회복하였다고 하였는데, 일본서기는 백제가 옛 서울 한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취했다고 밝힌 점을 보면, 일본서기가 위작된 부분도 많지만, 일부 내용에서는 세밀하고 자세한 부분까지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진흥왕이 2년만에 백제를 공략하고 남한강유역까지 빼앗아 간다.
이것은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는 백제가 회복한 한강유역과 한성을 차지하고, 고구려는 빼앗긴 평양을 되찾기 위해, 백제를 동시 공격한 것이다.
이로써, 성왕은 진흥왕에게 전면대결을 선포하고, 관산성 (충북 옥천)을 공략 하는데, 삼국사기는 성왕이 병사 50명을 이끌고 침입했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고 기록 하였다.
동네 패거리 싸움도 아니고, 국왕이 친정하는 전쟁에 병사 50명을 이끌고 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이런 부분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 이다.
그런데, 그 수수께기가 일본서기에 의해 풀린다.
웅략왕조 (유라쿠, 재위 456-479년) 기사를 보면, 백제 태자 여창 (훗날 위덕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에 쳐들어 간다. 이때 여창은 파죽지세로 신라군을 격파하고, 군열을 가다듬어 산성을 쌓고, 관산성을 공략하는데, 이때 성왕은 자신의 아들을 위로 하고자, 소수의 병력만을 데리고 길을 떠난다. 아마 성왕이 아들을 위로하고자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길을 떠난 것은 그 전쟁에서 위덕왕자가 거의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백제의 노비출신 고도가 이 사실을 신라군에 알려준다. 그래서 신라는 성왕의 이동경로를 미리 차단하고 있다가, 성왕을 생포하고 노비 고도로 하여금 성왕의 목을 베도록 한다.
우리 삼국사기에 쓰여있는 성왕이 친정하며 병사 50병만 이끌고 출정하였다가 전사한 수수께기는 바로 일본서기에 의해 해결된다.
이것은 사실 50명만 이끌고 전쟁을 나간것이 아니라, 그 전쟁은 태자 여창이 출전 하였고, 성왕은 그 아들을 위문하고자 나갔다. 이동경로가 신라군에 노출되어 생포되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우리 역사인 삼국사기가 놓친 부분을, 이웃 나라 일본에서 자세하게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일본서기 편찬자의 자료 수집 능력이 상당한 수준 이었던 것 만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가 모든 내용면에서 반드시 우수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서기는 신대기 부터 시작하는데, 이 신대기는 구약성경의 창세기나 그리스 신화와 유사하다.
신의 천지창조 부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은 구약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680년 당나라에는 이미 <경교>라 하여, 서양의 기독교가 소개 되었다. 중국 한나라 시절부터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던 왜도 당나라를 통하여 기독교의 성경을 구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높다.
한편, 일본 역대 최고의 정치가로 추앙받는 성덕태자 (쇼토쿠)는 왕족이지만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고, 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태자로써 많은 일과 성업을 배풀었는데, 일찍 죽어 왕에 오르지 못 했다.
이것은 예수의 마굿간 탄생과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승천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한편, 일본은 오랫 동안 신들에 의하여 통치를 받는데, 그 신들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손들은 서로 시기하고 싸우기도 하고, 쫓아내거나 죽이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일본서기는 일찍히 기원전 660년 신유년에 신무왕 (진무)이 일본을 건국하였다고 기록한다.
일본인들은 이 신무가 천손 (신의 아들)이라고 하나, 일본서기를 보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다.
(일본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면, 그것은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를 뜻 한다. 물론 일본은 이를 부정한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신무왕 이후부터 오늘 날까지 왕조가 변하지 않고, 천황가를 지켜왔다고 하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기원전 660년에 건국되거나 신무왕이 실제 건국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원전 660년부터 계보를 유지하여 밝힌 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이 글의 주제인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이다. 일본서기는 고대왕국시절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실제왕은 언제부터 이고 임나는 언제부터 기록되었는지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는 기원전 660년에 신무왕이 건국하였다고 하나, 역사가들은 9대 개화왕 (다이카, 재위 기원전 158-98년)까지의 기록은 역사가 아닌, 꾸미기식 치장에 불과하다고 한다.
1대왕부터 9대왕 사이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사망과 재위, 가족관계등 일상적인 내용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대 숭신왕 (스진, 재위 기원전 97-30년) 이후를 실제 일본의 역사로 보는데,
임나에 대한 최초 기록은 숭신왕 65년 (기원전 33년) 임나에서 사신이 조공을 받쳤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대 수인왕 (스이닌, 재위 기원전 29- 서기 70년) 2년에 위 임나 사신이 돌아간 것으로 기록했다.
그렇다면, 10대 숭신왕과 11대 수인왕은 실제 인물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유는 많은 역사가들이, 일본의 실제 왕은 15대 응신왕 (오진, 재위 270-310년)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가 일본이 기원전 660년부터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고 하나,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유물이 하나도 없다. 이집트의 경우 피라미드가 기원전 5천-3천년부터 있고, 중국의 경우도 기원전에 있었던 은나라, 주나라의 유물이 발굴되고, 심지어 진나라 시황의 무덤이 발견 되었는데, 일본의 경우 그렇게 유구한 시간을 뒷받침 해줄 만한 왕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15대 응신왕부터 실제 왕으로 보는 이유는, 15대 응신왕과 그 아들 인덕왕 (닌토쿠 재위 313-399년)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 되었는데, 이것이 일본 고대왕실 무덤 중에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660년에 일본을 건국한 초대왕 신무왕과 후손 14대 중애왕(쥬아이 재위 192-200년), 신공왕후(진구, 재위 200-270년)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응신왕과 인덕왕의 시간을 앞으로 끌어올려 만든 가공인물로 추정하는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보이는 15대 응신왕과 16대 인덕왕의 재위 기간은 270-310년, 313-399년 인데, 그럼 실제로 이 시기에 재위 하였을까?
그것도 아니다. 일본에서 응신과 인덕왕릉으로 추정되는 전방후원의 거대묘가 발굴 되었는데, 그 묘의 부장품을 보면, 대체로 4세기 후반 이후의 것 들이라고 한다. 백제왕릉에서 발견된 것들과 유사한 것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응신왕이 3세기 중반부터 4세기 초반의 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위 부분은 우리 삼국사기와 비교해도 금방 그 시간차이를 알수있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백제기] [백제신찬][백제본기]를 많이 인용하다 보니, 백제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수 있다.
응신왕의 부친이 중애왕인데, 그는 임나를 건설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아, 신의 미움으로 재위 8년만에 일찍 죽고, 응신왕의 모친 신공왕후 (진구여왕)가 200-270년 동안 섭정하여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이때, 신공왕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초고왕 (근초고)이 죽고, 귀수왕 (근구수)이 즉위했다.
귀수왕이 죽고, 침류가 왕에 즉위했다... 이런 기사가 나오는데,,,
위 내용을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하면,,, 120년의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
똑 같은 일인데,,, 일본서기가 삼국사기 보다 120년 앞당겨져 써있는 것이다.(2주갑자인상설)
2주갑자인상설을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글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는 비로서 15대 응신왕부터 실제 존재했던 왕이고, 한편 응신왕의 모친 신공왕후를 가공하며, 120년 앞당겨져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수있다.
이로써, 일본의 건국자는 1대 신무왕이 아니고, 15대 응신왕이며, 이전 왕들은 응신왕과 그 아들 인덕왕의 업적을 분산시켜 나눠쓰기 하고, 그러다 보니 실제로 있었던 사실 마져도 120년 앞당겨 쓴 것이다.
한편, 이 글의 주제가 되는 임나는 일본서기의 10대 숭신왕 기사에 처음 보이지만, 한편 숭신왕의 업적은 당연히 응신왕의 업적 이었다는 결론이다.
참고로 10대 숭신왕이 일본의 초대 국왕 이었다는 이론이 있으나, 그것을 뒤받 침할 유물이 없는 상황으로 위 이론도 일부에서는 부정되는 것이다.

끝으로 일본의 임라일본부를 이해하려면 응신왕의 모친 신공왕후를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부터는 다음 글에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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