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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2-16 (일) 16:43
ㆍ조회: 2138  
  서교공께서 진천송씨 신축보 1541년 완성 하셨다.
 
 
 
 
 
 
 
<1975년 을묘보에 해설한 신축년 족보 해설문>
 
 
개인적으로 정말 오랫동안 우리 진천송씨 집안의 문헌에 보이는 신축보 서문은 언제 쓰여진 것인지 의문 이었다.
우리 집안에서도 이미 1541년에 쓰여진 것으로 오래전에 공표하였고, 그렇게 알고있다.
물론 위 신축보가 언제 쓰여진 것인지 지금에 와서 그것을 계산해 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유는 신축보가 원문은 전하지 않고, 그 이후에 쓰여진 족보의 서두에 그 서문만 전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서문이 전하고 있으므로 후손들의 입장에서 이 글이 언제 쓰여진 것인지 연대가 궁굼한 것은 당연하다.


한편, 위 신축보는 송정공 후손 서교공 諱 찬 조부께서 쓰신 족보인데,
오늘 날 족보 처럼 범례나 행장문의 격식을 갖추고, 활자본으로 발행된 족보가 아니라,
서교공께서 자료를 수집하여 개인적으로 정리한 필사본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그 원본이 전래되지 않아, 활자본인지 아니면 필사본 이었는지 알수없고 추정할 뿐이다.

서교공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자는 치숙(治叔), 호는 서교(西郊). 판결사공 취(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위여절공 선효(善孝)이고, 아버지는 사지(司紙) 세증(世曾)이며, 어머니는 민휘(閔徽)의 딸이다.
1510년 (중종5)에 출생하시어, 1537년 (중종3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경기부사, 영흥부사, 판 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시고, 1601년 (선조35) 92세 되신 신축년에 서거 하시었다.

이렇듯 서교공께서 장수를 하시다 보니, 그분 생전에 신축년을 1541년과 1601년 2차례 맞이 하시여, 위 신축보 서문이 과연 언제 쓰여진 것인지 구별이 모호하기도 하다.
글에 중국 연호나 조선 왕실의 연호가 쓰여있으면, 그 연대를 쉽게 알수 있다. 그러나 신축보 서문에는 간지만 쓰여 있고 연호는 쓰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교공의 생졸년을 참고하고, 쓰여진 문맥을 분석하면 정확한 연대를 확인 할수있다.


현재,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1975년 을묘보, 1987년 정묘보, 2007년 정해보에는 위 신축보 서문이 한글로 해설되어 한문본과 기재되어 있는데, 그 해설을 보면 모두 1541년에 작성된 것으로 해설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을 잘못한 부분이 있어서, 자칫하면 1541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잘못이고, 1601년에 완성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게된다. 이유는 해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서교공께서 우리 집안 족보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신축보 서문에 밝혀져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을미년에 金兄 學光과 가까이 살면서, 김학광과 家世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렀는데, 김학광 이분이 자신의 돌아가신 부친 (先君)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한가로이 지내며 (退閒 :퇴한), 예성에 계실 때 외갓 집 (진천송씨) 계보를 시험삼아 지은 (蘂珹嘗撰外譜)내용이 있다 며 그 초보를 건네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金兄 學光을 우리 족보 해설문에는 仁兄 김학광으로 하였는데, 仁兄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친구나 몇 살 정도 어린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존칭 이라고 한다. 오늘 날 젊은 세대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60세 가까이 되거나 그 이상 되신 분들은 지금도 상대방을 김형, 이형, 박형, 이렇게 부르는 것을 볼수 있는데, 김형 학광이 바로 그것이다. 서교공이 김학광 이분 보다 2살 연상 이시다 보니, 서교공께서는 나이가 얼비슷하게 연하인 김학광 이분에게 김형 이라고 높여 부른 것이다.


위 문장에서 김학광이라는 분을 살펴보면 위 신축보가 1541년에 쓰여진 것인지, 1601년에 쓰여진 것인지 어느정도 확인이 된다.
김학광 이분은 본관 경주로, 이조참판을 지내신 김세필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1512년에 출생하시어 1547년에 서거 하셨는데, 그의 부친이신 김세필이 서교공의 고조부 이신 송정공의 네째 아들 군수공 諱 학의 외손자가 되신다.
즉, 서교공과 김학광은 촌수가 멀어 사돈 사이라 할수 있지만, 선대로 조금만 올라가면 외사촌 이었다.
김학광 이분이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셨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을사사화 때 당파에 밀려서 재산과 처자를 모두 몰수 당하고, 유배지에서 서거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정조 무렵에 복권 되었다.


그렇다면, 서교공께서 김학광 이분으로 부터 진천송씨 초보를 건네 받았다는 을미년은 1535년이 된다. 1595년 을미년은 이미 김학광 이분이 을사사화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축보가 쓰여진 연대는 1541년으로 볼수 있는데, 그렇다고 단정할 수 만은 없다. 이유는 서교공께서 생을 마감하신 1601년도 신축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집안 최근 족보가 위 신축보 서문이 1541년에 쓰여졌다고 해설하면서도 일부 내용을 잘못 해설하다 보니, 오히려 1601년에 쓰여진 것 처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잠시 원문과 해설문을 살펴보면,
1535 (을미)년에 서교공께서 '김형 학광에게 진천송씨 초보를 건네받아, 舊家에 전하는 보서들을 구하고, 각 파의 파보를 더 물어서 수록되지 못한 바를 더 수록하려 하였는데, 그 후 그것을 완성하지 못 하고 시일을 미루게 된 것은, 밀리는 사무와 병환 때문이다.'라고 되어있다.
물론, 위 내용은 그렇게 틀린 해설은 아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을 잘못 해설하여,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歲丁辛丑病餘尺 이하 부분이다.
해설문은 위 부분에 대하여 -정축년 (1517년 중종12)부터 신축년 (1541년 중종36)에 이르는 24년 동안 병중의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보를 붓 가는 대로 적어 놓아서 비로서 전일에 못다한 일을 오늘에 완수하였다.- 이렇게 해설 하였다.


이것은 서교공께서 앞 문장에 밀리는 사무와 병환으로 시일을 미루게 되었다. 라고 쓰셨는데,
그 뒤에 쓰여진 歲丁辛丑病餘尺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설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기 못 한 상태에서 번역을 하다보니, 본래의 뜻과는 전혀 먼 방향으로 오역한 것이다.


서교공께서는 1510년에 출생 하셨는데, 만약 歲丁辛丑病餘尺위 문장이 '정축년과 신축년 사이에 병중의 몸으로' 라는 뜻이고, 신축보가 1541년에 쓰여졌다면 서교공께서는 1517년 8살의 나이에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족보에 관심을 갖아 계보를 정리하기 시작하여 1541년 32세의 나이에 신축보를 완성했다는 것이 된다.
8살 이면 오늘 날 초등학교 1학년 인데, 그 당시에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소학언해를 공부할 시기이다. 그런데, 족보 편찬의 일을 시작했다는 것은 어디인가 석연치 않고, 마치 고전 신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다 보니 원문을 잘 읽어보지 않거나, 한문을 잘 몰라 한글 설명문만 읽은 사람은, 서교공께서 족보를 쓰기 시작했다는 정축년은 1577년이 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이를 완성했다는 신축년은 1601년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歲丁辛丑은 정축년에서 신축년 사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인은 옥편에서 한문을 모두 찾아 놓고도 문장의 해설이 안될 정도로 한문에 빈약하다. 따라서, 오래전에 우리 대종회에서 문화이사를 담당하시는 송정공파 안동 교하공 문중의 낙천 (병혁) 어르신께, 歲丁辛丑病餘尺의 뜻을 여쭈어 본적이 있는데, 위 분도 그 해설문이 잘못 되어 있다고 하셨다.
낙천 어른에 의하면 '丁'은 '當'자와 같은 뜻으로, 歲當辛丑으로 쓸수도 있는데,
먼저 '丁'은 고무래 정, 성씨 정, 장정 (성인 남자), 네번 째 (간지의 네번째), ~을 당하다 (當). 뜻으로 사용 되었으니, -위 문장은 신축년을 당하여 (신축년 이때에, 신축년에 이르러) 병을 앓고 난 이후에... 이런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본인이 경기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방문하여, 한문학 박사에게 저 문장을 보여주고 '丁'의 쓰임을 물은 적이있는데, 그곳에 계신 교수에 의하면, '丁'은 본래 간지의 네번째 라는 뜻과 함께 장정, 인구 등을 세는 단위로 쓰였고, 고무래 뜻과 함께 성씨로 하였으며, 흔한 표현은 아니지만, 當의 의미로 조우하다 (~~를 우연히 만나다. ~~을 당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사람 앞에 '丁'자가 쓰이면 우연히 만나다. 간지 앞에 '丁'자가 쓰이면 그 해를 당하여 ~~ 일이 있었다.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외 한자 공부를 좀 하신 분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분들 중에 '丁'은 별다른 뜻이 없는 '허사'로 보아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다.


한편, 그 동안 물어보았던 많은 분들이 위 문장이 '정축년부터 신축년 사이'로 볼수 없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만약, 저 문장이 정축년부터 신축년 사이라는 뜻이 된다면,,,
丁ㅁ 辛丑 이러한 형태로 글자가 하나 빠진 오기라고 할수 있는데,
저 문장이 쓰여진 원문이 단순한 필사본이 아닌, 활자본 이기 때문에 저런 오기를 한다는 것은 확률이 낮고, 自신축 至정축乃 24년 基間 이런 형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위 문장의 '허사'로 쓰여있든, '~~을 당하여' 當 의미로 쓰여있든,
歲丁辛丑病餘尺 이 문장은 '신축년에 병 앓이를 하고 난 이후에'... 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된다.
다만, 한문으로 쓰여진 다른 문장을 사례로 찾아 보았는데 '丁'은 허사로 보기 보다는 '當'과 같은 뜻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한편, 우리 진천송씨 대종회가 그 동안 신축보는 1541년에 완수 되었다고 밝혔고, 낙천 어르신도 신축보는 그 해가 맞다고 하셨다.
런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문학 교수에 의하면,
'서교공은 을미년에 김학광에게 진천송씨 초보를 건네 받았고, 그 완성을 위해 계보 정리를 시작하셨으나, 이를 곧바로 완수하지 못 한 이유에 대하여, 사무와 병환으로 시일을 미루고, <중간생략> 신축년에 병 앓이를 한 이후에 족보를 다시 써 이를 완수했다는 의미로 글을 쓰셨으니, 위 신축보 서문은 1541년 (서교공 32세)가 아닌 1601년 (서교공 92세)에 쓰신 것으로 볼수도 있다.' 고 하였다.
물론 그 교수가 위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해설한 것은 아니고, 대략 3-4분에 걸쳐 훌터보 듯 짧게 살펴보고 내린 결론 이었다. 그러면서 교수도 그 당시 "짧은 시간에 대충 훌터보고 해석하는 것이라, 정확히 1601년에 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자세한 것은 세밀하게 보아야 알수 있는데, 일단 대략 볼 때 그 동안 밀리는 사무와 병환으로 이를 완수하지 못 하였다... 라는 문장이 보이고, 신축년에 병을 당한 이후에 라는 글이 보이니, 이것은 젊은 사람이 쓴 글 보다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쓰신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 이었다.


그래서 얼마전 우리 카페에 본인이 신축보는 1541년이 아닌, 1601년으로 보인다는 글도 올렸다.


그런데, 얼마전 어느 분이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신축보 서문은 서교공께서 생을 마감하시는 1601년이 아닌, 한참 활동하신 1541년에 쓰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 이었다.

그리고 그 분은 아래와 같이 해설을 하였다.
[신축년에 한참이나 병에 시달리었다. 그러고 나서 동분서주하며 노력하였다. 이 때에 비로소 생각하기를, 전에 이루지 못한 뜻을 오늘 좇는 것은, 일에 매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묻는 것이 쉬울 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분에 의하면 '歲丁辛丑病餘尺'에서 '丁'은 허사로 보인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 보이는 '騖西馳東' 이라는 표현을 지목 하셨다.
'무서치동'은 일반적으로 '바쁘게 움직이다'라는 뜻의 관용구 인데, 오늘 날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아, 오늘 날 표현으로 하면 동분서주하다 라는 뜻과 같다고 하셨다.
우리 족보 해설문도 무서치동을 동분서주 하다로 설명해 놓았다.


즉,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서교공께서 을미년에 김학광에게 초보를 건네받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여러 사무와 병환으로 이를 미루다가, 신축년에 비로소 이를 다시 시작하여 완수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서교공께서 여러곳을 바쁘게 돌아다니시며 자료를 구하였는데, 그 뒤에 나오는 계원군 (桂原君)을 뵙고 옛 책을 얻었다는 내용, 송만경 (宋萬頃) 댁에서도 책을 구하였고, 참봉 송지군 (宋志君)의 도움을 받았고, 송판각 (宋判閣) 댁과 송별시 (宋別提) 댁에서도 구보가 있다는 것을 듣고 찾아 갔다는 내용들이 騖西馳東에 해당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騖西馳東은 '노력하다' '바쁘게 움직이다.' 뜻으로 사용되었고, 馬자가 들어가 있어서 말을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왕성한 활동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92세인 신축년에 병을 얻고 생을 마감하시는 분이 騖西馳東 표현으로, 초보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은 어색하고, 따라서 젊은 나이인 32세 (1541년 신축)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서교공은 말미에 松亭公後人 宋西郊謹草敍라고 쓰셨는데,
송정공후손 송서교 삼가 간략히 서술하였다... 라는 뜻 이다.
통상 옛날 어른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면 글 말미의 이름 앞에 관직함을 함께 쓰는 관례가 있었다.
통훈대부,,, 통정대부,,, 이조참판,,, 이조참의,,, 판 정주목사, 이런 관직을 함께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서교공은 31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경기부사, 판 돈녕부사 등을 역임하고, 정1품계까지 받았음에도 관직함을 쓰지않고, 자신의 호 (서교)를 직접 쓰셨다.
만약 92세에 쓰신 글이라면 정1품에 맞는 관직을 함께 쓰셔야 통상적 인데, 과거에 급제하고도 자신의 호를 직접 쓰신 것은 아직 관직 경험이 짧아, 내세울 만한 관직을 받지못 했거나, 낮은 벼슬에 있던 젊은 시절이기 때문에 자신의 호를 직접 쓰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 신축보 서문은 1541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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