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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7-22 (월) 02:04
ㆍ조회: 29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贈)예조 판서(禮曹判書) 송공(宋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贈)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공(宋公) 신도비명 병서

      
옛날 나와 공이 조정에 죄인이 되어 함께 견책을 받고 축출되었다. 내가 서용(敍用)되어 연행(燕行)을 갈 때에도 공은 여전히 교외(郊外)에 은둔해 있었기에 내가 술 한 병을 들고 고별(告別)하러 갔다. 나는 공의 한가한 생활을 부러워하고 공은 먼 길을 가는 나를 걱정하면서 서로 한숨을 쉬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내가 무사히 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공은 지하에 들어간 지 이미 석 달이 지났다. 잠깐 사이에 공은 영영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인간 세상에 외로운 이 몸, 지기(知己)가 누가 있단 말인가. 공이 숨을 거두었을 때에는 가서 널을 부여잡고 통곡하지도 못했고, 공의 장례 때에는 상여 끈을 잡고 전송하지도 못한 채 유명(幽明)의 길이 이로부터 나뉘고 말았으니, 내 어찌 공을 위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면, 공의 휘는 영구(英耈)이고 자는 인수(仁叟)이다.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여조(麗朝)로부터 대대로 명인(名人)이 있었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 우(愚)라는 분이 유학(儒學)으로 대관(大官)에 이르렀는데 호는 송정(松亭)이다. 그 손자 선문(善文)은 아홉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여 처사(處士)로 일생을 마쳤다. 이분이 휘 모(某)를 낳았으니, 증 좌통례(左通禮)이다. 이분이 휘 모(某)를 낳았으니, 증 좌부승지(左副承旨)이다. 이분이 정암(靜庵)의 형인 목사(牧使) 조숭조(趙崇祖)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휘 모(某)를 낳았으니,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다.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이다. 처사공(處士公)부터 참판공(參判公)까지는 의당 현달(顯達)할 수 있었는데 운수가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모두 가정의 훈육을 받고 행실을 닦아 가문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아 세상에서 공의 가문을 명족(名族)이라 일컬었다. 모친 진주 하씨(晉州河氏)는 문효공(文孝公) 모(某)의 후손이고 사온서 영(司醞署令) 세준(世濬)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준수하고 영특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천거를 받아 주서(注書)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임기가 차면 관례에 따라 승진하게 되어 있었으나 숙모부(叔母夫) 유공 근(柳公根)이 이조 낭관(吏曹郞官)으로 있었던 탓에 친혐(親嫌)에 걸려 서반(西班)의 자리에 서용(敍用)되어 사과(司果)가 된 것이 4년이었다.
정해년(1587)에 부친 참판공의 상(喪)을 당하였고, 오래지 않아 연이어 외간(外艱)을 당하였다.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는 조모상(祖母喪)에 상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전후로 한가한 세월을 보낸 것이 모두 6년이었다.
임진년(1592)에 이르러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고 공은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 공은 병졸 1000여 명을 모집하여 곧바로 행재(行在)로 달려갔다. 도중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병졸을 막료(幕僚)에게 맡기고 단기(單騎)로 난리 속에 달려가 적의 호혈(虎穴)을 뚫고 간신히 행조(行朝)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정언(正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바뀌어 지평(持平)이 되었고, 성절사 서장관(聖節使書狀官)이 되어 북경에 갔다. 사행에서 돌아오자 즉시 완산(完山)으로 돌아가서는 세 차례 지평에 제수되고 두 차례 헌납(獻納)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고 수군(水軍)을 아울러 맡아 폐추(廢墜)한 고을을 보수 정비하여 군민(軍民)이 큰 힘을 입었다. 이에 순찰(巡察)이 그 사실을 장계로 보고하여 1년을 더 유임하고 내직으로 들어가 지평, 겸문학(兼文學)이 되었으며, 얼마 뒤 천거를 받아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정부(政府)가 검상(檢詳)ㆍ사인(舍人)에 천거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간(司諫)에 제수되었다. 언사(言事)로 외직에 좌천되어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되었고, 갑진년(1604, 선조37)에 해임(解任)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좌천되어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이 되었고 해를 넘겨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거짓 명망을 얻어 고을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고을에 목사가 된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집에 찾아가야 하고 제반 일을 모두 그에게 물어보고 시행해야 했다. 공이 성주에 부임해서는 절대로 정인홍과 통문(通問)하지 않았으며, 정인홍의 족인(族人) 중 세력을 믿고 날뛰는 자를 공이 포박하여 매를 때렸다. 이에 그 무리들이 크게 놀라 공을 무고(誣告)하여 파직시켰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서용(敍用)되어 필선(弼善), 사간(司諫), 보덕(輔德),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그리고 형조 참의(刑曹參議),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역임하였고, 오래지 않아 대사간(大司諫)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선치(善治)를 이루고 조정에 돌아왔다. 그리고 성절사(聖節使)로 북경에 갔는데 당시 천조(天朝)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교통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공이 정문(呈文)을 올려 우리의 실정을 통렬히 밝혔는데, 그 진달한 내용이 명백하고 간절하여 천조의 예부(禮部)가 가상히 여겨 주청(奏請)한 것이 모두 윤허를 받았다. 공이 돌아와 복명(復命)하자 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는 분병조 참판(分兵曹參判)을 맡았다. 당시 적신(賊臣)이 국가의 명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공의 명망을 중히 여겨 반드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날마다 공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공은 그들을 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끝내 답례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나직이 시를 읊으며 마치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니 사람들이 공의 심중을 엿볼 수 없었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백료(百僚)가 정쟁(庭爭)하였다. 공은 강경한 자세로 반대하고 시종 동참하지 않으니 흉도(凶徒)들이 집에서 헌의(獻議)하게 하였다. 이에 공은 추부랑(樞府郞)에게 글을 보내기를, “이 일은 모름지기 의리(義理)에 합당한지 십분 강구(講究)해야 합니다.” 하니, 대관(臺官)이 합사(合辭)하여 원찬(遠竄)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그날로 당장 동교(東郊)로 나갔으나 근심과 분노가 그만 병이 되어 3년 뒤 경신년(1620)에 우사(寓舍)에서 숨을 거두니, 춘추 65세였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반정(反正) 당초에 우리 성상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하게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의론이 정직하였다. 성품은 또 강직하여 남의 과오를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려워하였다. 처음 지평이 되었을 때 권귀(權貴)의 총애를 받는 자가 세력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하자 공이 그를 수금(囚禁)하였다. 대사헌이 풀어 주고자 하여 누차 공에게 청하였으나 공은 “나는 국법(國法)을 지킬 뿐입니다.” 하고 마침내 중벌로 그자를 다스렸다. 이에 그 권귀가 노하여 몰래 공을 중상(中傷)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피하는 연경(燕京)으로의 사행(使行)을 가게 되었다. 공이 외직으로 나가 청풍(淸風), 대동(大同), 성주(星州)로 부임할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며 안타까워했으나 공은 조금도 불쾌한 기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정성을 다 쏟아 봉직(奉職)하였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좋아하고 아전들은 두려워하였으며, 세금을 절감하여 거두고 부역을 제때에 맞게 시켜 공사(公私) 간에 형편이 여유로워졌다. 이에 안찰사(按察使)가 공의 치적을 보고하여 재차 포상(褒賞)이 내렸다.
공은 조행(操行)이 청렴결백하고 효성과 우의(友誼)가 도타웠으며 집안의 생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처자식들이 늘 주림과 추위에 시달렸으나 공은 늘 편안한 모습이었다.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형편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대를 털어서 주고 집안 형편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없는 친족이 있으면 집에 데려다 놓고 꼭 자기 자식처럼 양육하였다.
정유년(1597)의 난리 때 적병(賊兵)이 추격해 오는데 공의 재종형(再從兄)의 아들은 겨우 여섯 살이었고 서제(庶弟)의 아들은 세 살이었다. 공은 잘 걷지 못하는 그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앞으로 안고 뒤로 엎은 채 말을 타니 무거워서 말이 잘 가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차마 아이들을 버리지 못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부인(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정(正) 승경(承慶)의 따님으로 현숙(賢淑)하여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운명하기 나흘 전에 완산(完山)의 장사(庄舍)에서 운명하여 고을 북쪽 모향(某向)의 둔덕에 공과 합장(合葬)하였으니, 선영(先塋)에 묻은 것이다. 아들이 없어 재종형(再從兄)의 아들 흥시(興詩)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흥시는 지금 벼슬이 전중(殿中)이며, 사간(司諫) 최상중(崔尙重)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아들 다섯, 딸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
공의 측실 소생 아들은 모두 여섯이니 흥목(興牧), 흥렵(興獵), 흥경(興耕), 흥축(興築), 흥곡(興穀), 흥송(興松)이며, 딸은 셋이다.
전중군(殿中君)이 나에게 말하기를, “선군자(先君子)께서 늘 ‘백사(白沙) 이공(李公), 추포(秋浦) 황공(黃公), 월사(月沙) 이공(李公)이 나의 벗이다.’ 하셨는데 공만 계시고 모두 세상을 떠나셨으니, 묘비에 새길 글을 공이 맡아 주십시오. 삼가 비석을 다듬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진실로 차마 공의 명(銘)을 지을 수도 없지만 또한 차마 공의 명을 짓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에 드디어 눈물을 훔치며 글을 짓고 이어 명을 붙인다.

굳세고 강한 하늘의 덕은 / 天德之剛
굽혔다가 늘 다시 펴는 법 / 屈而常伸
공은 그러한 천품 타고나 / 公惟夙稟
세파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네 / 不緇不磷
곧은 자세로 자신의 뜻 관철하고 / 秉直自遂
언제나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여 / 信躬而行
검약한 조행에 호방한 기상 넘치고 / 約不掩豪
선행을 해도 명예를 바라지 않았네 / 善毋近名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을 때는 / 寵以天曹
하찮게 보고 깜짝 놀라 피했으나 / 芥視若驚
낮은 관원으로 좌천되었을 때는 / 辱之馬官
영광인 듯 달려가 부임하였어라 / 趨事如榮
시국이 매우 어려울 때를 만나 / 遭時孔艱
세속에 섞여 이은으로 살았느니 / 混世隱吏
근심에 깊이 잠겨 말하지 않은 채 / 沈憂不語
두문불출하며 세상사 사절했어라 / 杜門謝事
공이 올린 한 줄의 글은 / 一行奏牘
천고의 강상을 지킨 것이요 / 千古綱常
필마를 타고 동문 밖으로 나와 / 匹馬東門
쓸쓸히 외진 향리로 은둔했어라 / 蕭然遯荒
위태한 조정에 우뚝이 서서 / 壁立危朝
그 지조 바꾸지 않았으니 / 不改其標
이야말로 완인이라 / 寔爲完人
거의 도에 가까운 분이로세 / 庶幾乎道

同知中樞府事贈禮曹判書宋公神道碑銘 幷序

     
昔余與公得罪于朝。同被譴逐。及余起廢燕行也。公猶屛迹郊外。余以一壺告行。余羨公閑養。公憂我遠役。相與噫噓而別。逮余之生還也。公之入地。已三閱月矣。俯仰之間。已成千古。踽踽人間。誰知己者。沒不得憑棺一慟。葬不得執紼以送。幽明之路。從此訣矣夫。余烏能已於一言。按狀。公諱英耇。字仁叟。鎭川宋氏。自麗朝。世有名人。入國朝有諱愚。以儒雅致大官。號松亭。其孫曰善文。九擧不中。以處士終。生諱某。贈左通禮。生諱某。贈左副承旨。娶靜庵之兄牧使趙崇祖之女。生諱某。贈吏曹參判。是公之考也。自處士至參判。宜達而窒。然皆襲訓砥行。不墮家聲。世稱名族。妣晉州河氏。文孝公某之後。司醞署令世濬之女。生公於嘉靖丙辰。自幼儁穎卓異。甲申。登第。薦拜注書。仕滿例陞。而叔母夫柳公根爲吏曹郞。格於親嫌。西敍爲司果者四年。丁亥。丁參判公憂。未幾。連遭外艱。服闋。代祖母喪。前後處散者凡六年。至壬辰。松江鄭相公爲都體察使。辟公爲從事官。拜禮曹佐郞。公募兵千餘人。直趨行在。道聞除侍講院司書。卽以兵付幕僚。單騎赴難。蹠穿虎穴。僅達行朝。遷正言改持平。充聖節使書狀官朝京。還卽歸完山。三爲持平。再爲獻納。皆不就。己亥。除忠淸都事。兼掌舟師。修起廢墮。軍民賴之。巡察以其狀聞。留一年。入爲持平兼文學。俄薦拜吏曹佐郞。陞正郞。政府薦拜檢詳,舍人。未幾拜司諫。言事出爲淸風郡守。甲辰。解印歸。左遷大同察訪。踰年病還。復出爲星州牧使。時仁弘盜名橫州里。牧是州者。必先詣其門。事皆咨稟而行。公至則絶不通問。其族人有藉勢者。公縛而笞之。其徒大駭。誣劾公罷。庚戌。敍拜弼善,司諫,輔德,同副承旨。陞左副病遞。拜刑兵曹參議,參知。尋遷大司諫。拜慶尙道觀察使。政成還朝。以聖節使朝京。時天朝方疑本國交通日本。公呈文痛辨。陳白明懇。禮部嘉之。所奏皆蒙允許。復命。用是勞。陞嘉善。拜同知中樞府事。丙辰。分兵曹參判。時賊臣擅國命。重公名。必欲鉤致。日相造請。公不直視。終不報謝。閉戶沈吟。若有所思念。人莫窺其際。逮廢母之論起。百僚庭爭。公抗言力斥。終始不參。兇徒令在家獻議。公書給樞府郞曰。此事須於義理上十分講究。臺官合詞。論請遠竄。公卽日出東郊。憂憤成疾。粤三年庚申。卒于寓舍。春秋六十五。癸亥反正初。我上命追贈禮曹判書。遣官致祭。公風神秀朗。論議正直。性又剛方。不能容人過。人皆嚴重之。初爲持平。有嬖人恃權貴恣行。公囚之。都憲欲緩之。累請於公。公曰。吾持三尺律而已。竟置重典。權貴怒陰中之。遂有燕京衆避之行。其出麾爲淸風,大同,星州也。世皆嗟惜。而公則略無幾微。見於色辭。殫誠奉職。所至民懷吏畏。稅節賦時。公私裕足。按使上治績。再有褒錫。潔修砥礪。敦行孝誼。不事家人產業。妻子常苦飢寒。處之晏如。性好施人。有以匱告者。罄橐與之。不問有無。親族之不能自存者。館而廩之。一如己出。丁酉之亂。賊兵在後。公之再從兄子甫六歲。庶弟之子三歲。公憐不能步。前抱後負。馬重不能行。猶不捨。見者嘉歎。夫人坡平尹氏。正承慶之女。賢有婦德。公卒前四日。卒于完山莊舍。與公合葬于州北某向原。從先兆也。無子。取再從兄子興詩爲嗣。官今殿中。娶司諫崔尙重女。生男五人女二人。幼。公之側室子凡六人。興牧,興獵,興耕,興築,興穀,興松。女三人。殿中君謂余曰。先君子常言白沙李公,秋浦黃公,月沙李公。吾友也。今皆下世。獨公在。不朽之託。子其任之。謹治石以俟。余固不忍銘公。亦不忍不銘。遂掩涕而爲文。系之以銘曰。
天德之剛。屈而常伸。公惟夙稟。不緇不磷。秉直自遂。信躬而行。約不掩豪。善毋近名。寵以天曹。芥視若驚。辱之馬官。趨事如榮。遭時孔艱。混世隱吏。沈憂不語。杜門謝事。一行奏牘。千古綱常。匹馬東門。蕭然遯荒。壁立危朝。不改其標。寔爲完人。庶幾乎道。

[주-D001] 이은(吏隱) : 
녹봉에 연연하지 않고 낮은 직급의 관리로 있음으로써 이름을 감추고 사는 것을 이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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