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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16 (화)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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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은 서울 중구 묵정동에 있었다.

1673년 계축보 송정공 세주이다.

字汝省 元至正十四年 高麗恭愍王三年 甲午生 洪武九年 辛禑二年 丙辰命 知貢擧 政當文學 洪仲宣 同知貢擧 知密直 韓倄 取 鄭捴 等 三十三人 公以生員中同進士 第十三人 成石瑢 偰眉壽 姜谁伯 崔瀁 李種學 禹洪得背 基同傍也. 歷在 司諌 寳文閣直提學 知製敎 禮曹參議 後陞 嘉善大夫 判安邊府使 享年七十 號寓庵 又號松亭 或稱 山陰病物 松都家在墨寺洞 故漢都家亦卜於黑寺洞 成政丞希顔家乃其舊第 世稱 宋松亭 峴置薄于家前至今傳之薄軍堡也.

자는 여성이며, 원나라 정지14년 고려공민왕3년 갑오(서기 1354년) 출생하였다. 홍무9년 신우2년 병진(서기 1372년)에 명으로 지공거 정당문학 홍선중 동지공거 지밀직 한효가 정총 등 33인을 선발 하였는데, 공은 생원으로 동진사 제13인에 급제했다. 성석용 설미수 강수백 최양 이종학 우홍득 등이 그 동방(문과급제 동기)이다. 사간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예조참의에 있었고, 후에 가선대부 판안변부사에 올랐으며, 향년 70세 이시다. 호는 우암이며 또다른 호는 송정이 있고, 혹칭으로 산음병물이 있다.

송도(고려 개성) 집이 묵사동에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한도 (조선 한양) 집 역시 묵사동에 정했는데,정승 성희안(成希顔)의 집이 곧 그 옛집이다. 세상 사람들이 송송정(宋松亭)이라 했는데, 고개가 집앞에 근접해 있어, 지금에 전해오길 '박군보' 라고 한다.

軍堡(군보) : 군에서 쌓은 보루  -> 薄軍堡(박군보) : 군에서 쌓은 보루처럼 생기다.

송정공 조부의 이력을 소개하고 집터와 관련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묵사동(墨寺洞)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쓰는 먹을 제조하여 공급하던 묵사(墨寺)라는 절이 있어 유래 되었으며, 지금 서울 중구 장충동 관할 묵정동 인데, 지하철4호선 충무로역과 동대문역 사이 산부인과로 유명한 '제일병원' 일대이다.

묵정동은 법정동 이며 행정동은 장충동 관할에 속한다. 즉 묵정동의 '동'은 동사무소가 있는 행정 개념이 아니고, 동네를 가르키는 법정 개념이다. 묵정(墨井) 지명은 묵사가 있던 자리인 '먹절골'이 있고, 깊은 우물이 있어 우물이 검게 보인다는 '감정우물골'이 있어서 유래 하였다. 이런것을 모르니 한때 묵사동을 필동으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송정공은 고려말 우왕2년 급제하여 고려의 관직에 있었고, 훗날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국을 하자 조선의 관직도 나아가, 개성 묵사동에 집이있고 한성 묵사동에도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송정공은 두분의 부인을 두셨는데 前配 전의집안 이사안 따님, 後配 결성집안 장하 따님 이시다. 그리고 전부인은 부사공 諱 목, 도사공 諱 익을 낳으시고, 후부인은 판결사공 諱 취, 군수공 諱 학, 부승지공 諱 휘를 낳으셨다. 송정공과 전부인의 묘소는 오래전 잃었는지 1673년 계축보는 '不知' '알수없다.' 하였고, 1799년 기미보 이후는 '失傳' '잃어서 전하지 않는다.' 하였다. 송정공의 차남 도사공은 묘 위치가 나오지 않으며, 도사공의 장남 첨지공 諱의(도사공 익산, 춘천 조상)와 차남 진사공 諱 상(도사공 용인 조상)의 묘 위치도 나오지 않고, 아울러 도사공 손자 진사공 諱 찬(도사공 익산)과 군수공 諱 계(도사공 춘천)의 묘 위치도 언급이 없다.

이후 도사공 집안은 진송 12代 생원공 諱 옥이 전북 익산, 12代 결이 경기 용인, 13代 諱 미가 강원 춘천으로 입향하며, 이후 송정공의 장남 부사공 집안이 진송 15代 후송에 이르러 후사없이 멸문한 것이다. 한편 도사공 집안은 비로서 1946년10월15일 전북 익산시 왕궁면 흥암리에 도사공 이하 3대조를 설단하고, 1957년 정유보(안성공 집안 편찬)부터 도사공 이하 3대조 묘를 잃었다고 쓴다.

반면 삼남 판결사공 諱 취의 묘는 본래부터 경기 연천군에 모셔져 있으며, 송정공의 후부인 결성장씨 묘는 경기 양주군에 모셔졌으나, 1986년 군사용지수용으로 경기 연천군 판결사공 묘역 위쪽에 모셨다. 그리고 송정공과 전부인은 1946년 무렵 경기 양주군의 결성장씨 묘 옆에 설단 하였으나, 현재 경기 연천군 결성장씨 묘 옆으로 이전하였다.

어쨋튼 전의이씨 소생의 후손들은 차남 도사공 집안이 조선 중종 이후 지방으로 낙향하였고, 그 사이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장남 부사공 집안은 후사없이 멸문하고 묘소를 잃었다.

송정공 조부와 도사공 이하 3대조 묘소 실전은 도사공 후손의 잘못이 크지만, 경기 개성지역에 도사공 묘소가 있어서, 1945년 해방되고 남북분단 이전에 도사공 후손들이 개성의 묘역을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로써 개성쪽에 도사공 집안의 묘가 있던 것으로 보이나, 본인은 도사공 집안이 그 무렵까지 개성을 다니며 묘소 관리했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다. 이유는 너무 오래되어 현재 살고있는 사람 중에 도사공 묘를 보고온 사람이 없으며, "예전에 누가 다녀왔다고 하더라." "우리 할아버지가 다녀왔었다."고 들었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사공 집안이 전북 익산, 강원 춘천, 경기 용인에 세거하는데, 본인이 만나본 도사공 후손이 비록 10명 내외로 적지만, 도사공 춘천 집안은 개성에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도사공 용인 집안은 막연히 '개성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정도에 불과하며, 도사공 익산 집안도 대부분 "개성에 묘가 있었는데 분단되고 잃었다."고 하지만 묘 위치가 어디인지 대부분 모르고, 그나마 간혹 "도사공 묘가 개풍군에 있었다."고 하거나 "개성 도성에서 북쪽 박연폭포 쪽에 있었다."고 하는 등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개성에 도사공 재실도 있어서 남북분단 이전에는 시제를 지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도사공 묘가 개풍군에 있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개풍군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한 이유를 알게되었다. 계축보에 보이는 송도의 집 묵사동이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토성리 이다. 그래서 이게 잘못 알려져 도사공 묘가 개풍군에 있었고, 재실도 있어서 구한말까지 시제를 다닌것으로 알려진 것같다. 조선중기까지 개성에 도사공 재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남북분단까지 재실이 남아있어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조부나 부친이 시제를 다녔을 가능성은 없다. 이미 조선 중종 때 지방으로 내려가 개성에는 도사공 후손이 살지 않았는데, 몇 백년 이상 한옥이 유지될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재 도사공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믿을수  없고 전설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사공 집안은 1946년10월15일 전북 익산에 설단을 하는데, 남북분단은 1945년이고, 토지개혁은 1946년3월 이었다. 즉 남북분단과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3.8선 이북의 묘를 갈수 없으니 부득이 전북 익산에 설단한 것이다. 그런데 개성은 3.8선에 걸쳐있어서 도성과 그 남쪽은 남한영역 이었고, 도성 북쪽은 북한영역 이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후 1953년 휴전되며 개성 남쪽에 휴전선이 생기며 개성은 북한영역이 된거다. 그래서 개풍군에 도사공 묘가 있었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

이역시 정확하지 않지만, 나의 고모부에 의하면 나의 조부께서 개성에 다녀오신 후, "개성에 있는 묘가 관리되지 않는데, 거리가 멀고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서 걱정이다."는 이야기를 했다는데, 묘는 "개성 도성에서 북쪽 박연폭포 방향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잃은 조상 묘가 있다며, 개성지역의 오랜 묘 중 관리되지 않아 연고자가 없는 묘를 알아본 후, 혹시 땅속에 묻혔을지 모르는 비석을 찾기위해 봉토 주위를 파던 중 연고자가 나타나 엄청 혼나고 보상해 주고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도사공 익산집안 입향조 묘가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우주황씨'와 '고흥유씨' 묘역에 모셔져 있는데, 입향조 진송 12代 생원공 諱 옥, 아들 장사랑공 諱 현, 손자 학생공 諱 경운이다. 그런데 묘에 비석이 있고 뒷면에 1728년 세웠다는 글이 있으나, 1673년 계축보는 이미 비석이 있다고 하였으니 1728년 새로 세운 것인데, 이로써 나의 조부는 옛비석을 찾으면 그곳에 잃어버린 조상 묘의 지명이 쓰여있지 않겠나 생각하여, 생원공과 장사랑공 묘 주위를 파보았으나 옛 비석을 찾지 못 했고, 그해 여름 장마로 묘 앞쪽이 허물어져 축대를 다시 쌓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조부가 다시 쌓은 그 축대가 지금도 남아있다.

나의 고모부는 송정공이 누구인지 도사공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자신의 장인이 개성 도성의 북쪽방향 박연폭포 인근의 묘를 다녀온 후, 잃은 묘가 더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송정공 묘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개성에 도사공 첨지공 진사공 3분 묘가 모두 있었는지, 아니면 한분만 있었는지 그것은 모른다.

도사공 집안은 족보에 개성 묘 위치를 쓰지 않았는데, 묘를 잃어서 쓰지 않은 것 보다 도사공 집안이 개성을 떠나 지방으로 낙향했는데, 얼마 후 장남 부사공 집안이 멸문하여, 개성의 재산이 먼 친척에 의한 침해를 염려하여, 도사공 이하 묘 위치를 수록하지 않고 입향조 부터 수록한 것으로 예상한다.

이로써 최근 판결사공 집안에서 어느 사람이 송정공 묘 실전을 도사공 집안 탓하는데, 부사공 집안 멸문 이후 만약 개성에 재산이 남아 있었다면 과연 먼 곳으로 내려간 도사공 집안에 순수히 승계 되었는지 의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재산 앞에서 먼 친척은 타인이나 마찬가지 이다. 불과 30년전 양주에 있는 송정공 재산관리와 처분과정만 보더라도, 도사공 집안이 장손 이지만 판결사공 집안 사람끼리 좌지우지 하다 탕진한 것만 보아도 알수있다. 그런데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는 송정공과 전부인 묘소를 개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도사공 후손들이 그 재산을 탕진하여 송정공 묘를 잃었다는 추리를 하는지 알수없다.

계축보에 "송도(고려 개성)의 집이 묵사동에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한도(조선 한양) 집 역시 묵사동에 정했다." 하고, 도사공 집안 묘소가 개성에 있었다고 전래되어, 송정공과 전부인 묘가 과연 개성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느 집안이 부친과 전부인 묘는 전부인 자손이 모셔가고, 후부인 묘는 후부인 자손이 따로 모시는 일이 있겠나.?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고 어떻게 잃었는지 모르는 조상 묘를 남 탓하기 위해, 예법에 없는 논리를 내세워 도사공 집안이 개성 재산을 탕진하여 송정공 묘를 잃었다고 하는데, 배우자가 두분인 경우 대체로 남편과 전부인을 합장하고, 그 인근에 후부인을 모시는 것이 관례이다. 계축보에 "송정공은 송도 묵사동에 집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한도 묵사동에도 집을 정했다." 하였고, 결성장씨 묘는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니,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가 양주에 있었으면 잃었을리 없다며, 장남 부사공과 차남 도사공이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를 개성으로 모시고, 삼남 판결사공은 서울에 살며 결성장씨를 양주에 모셨다는 논리인데,  조선시대 어느 집안이 부모 묘를 모실 때 후부인 묘를 남편과 전부인 합장묘에서 따로 떼어 먼곳에 두는 경우가 있었나.?  "돈은 판결사공 몫이요. 창피한 것은 도사공 집안 때문이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니,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결성장씨는 부인인데 어째서 자신의 남편이 있는 곳이나 그 가까이에 모셔지지 않고, 따로 뚝 떨어져 모셨다는 것인지 알수없다.

도사공 익산에 가면 진송 16代 진사공 諱 시우는 前配 진주소씨 後配 전주최씨가 있다. 진사공과 진주소씨 할머니는 합장하고, 그 우측 아래 전주최씨 할머니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진주소씨 할머니는 장남 설을 낳고, 전주최씨 할머니는 차남 범 삼남 화 사남 규를 낳았으며, 장남 설의 후손이 충남 논산에 거주하고 있는데, 진사공과 배우자 묘를 익산과 논산으로 나누지 않고 익산 한곳에 모셨다. 이것이 정법이다. 그런데 어디에 송정공 조부의묘 실전을 어떻게 해서든 판결사공 집안 잘못이 아니라고 하기위해 부사공과 도사공이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를 개성에 모시고, 판결사공은 결성장씨 묘를 양주에 모셨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펼치며, 어째서 자기 할머니는 남편 옆이나 근처에 모셔지지 못한 것처럼 말하는지 모르겠다. 송정공 묘 실전을 도사공 집안 잘못으로 미루려다 보니 별소리를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송정공 조부와 결성장씨 조모 중 어느 분이 먼저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송정공 조부는 말년에 서울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축보에 송정공 호는 '송정'이고 '우암'이며  '산음병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아울러 한도(漢都) 집이 묵사동에 있고, 사람들이 송정이라고 했다는데, 이곳에 보이는 묵사동은 현재 서울 중구 묵정동으로 지하철4호선 충무로역과 동대문역 사이이며, 산부인과로 유명한 '제일병원' 일대로 추정한다. 남산 북쪽에 위치하는데, 송정공의 별칭 '산음병물'도 이곳에서 유래한 것을 알수 있다. '산음'은 산의 음지로 산의 북쪽을 뜻하고, 병물은 병을 다스리다 뜻이다. 즉 송정공의 한도 집이 있던 묵사동은 남산 북쪽이다. 그로인해 '산음병물' 별칭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송정공은 말년에 서울 묵사동에 계셨다는 것을 알수있는 부분이다. 한편 송정공의 전부인 전의이씨는 아마 고려 때 사망하신 것으로 보여 묘가 개성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송정공이 서울에서 돌아가셨는데 멀리 떨어진 개성의 전부인과 함께 모셔지고, 이후 결성장씨만 양주로 모셨다는 것은 맞지않다.

확인되지 않는 일을 추정하기 싫어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도사공 묘가 개성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자, 근거없이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가 개성에 있던 것으로 보고, 도사공 집안이 개성 재산 탕진하여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를 잃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언급하게 되었다.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가 개성 도성 인근에 있었다고 가정할 때, 연천은 직선거리 30킬로미터 내외이고, 양주는 40킬로미터 내외이다. 반면 전북 익산은 직선거리 230킬로미터, 강원 춘천은 110킬로미터, 경기 용인 백암면은 120킬로미터 내외이다. 개성에 도사공 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만으로 장남 부사공 집안이 멸문 후, 개성의 재산이 과연 도사공 집안에 순수히 승계되었을까? 판결사공 집안은 옛부터 판결사공 재산은 당연히 판결사공 후손 것이고, 송정공 재산도 판결사공 후손 것이었지, 도사공 집안은 재산 앞에서 타인 이었다. 그런데 송정공 묘소가 개성에 있었다며 도사공 집안이 개성 재산을 탕진하여 송정공 묘를 잃었다고 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성에 재산이 있었다면 도사공 후손들이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장남 부사공의 후손이 멸문하여 무주공산이 되었는데, 100~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도사공 집안이 차지하기 쉬웠을까? 아니면 불과 30~40킬로미터 떨어진 판결사공 집안에서 차지하기 쉬웠을까? 이처럼 개성에서 일찍이 멀리 떠난 도사공 집안은 개성의 가까운 곳에 살고있는 먼 친척의 재산 침해 우려로 인해 과거에 개성에 있었던 도사공 이하 3대조 묘의 위치를 족보에 수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사람의 추측 처럼 만약 장남 부사공 집안 멸문 후, 도사공 집안에서 그 재산을 탕진했어도, 연천과 양주는 개성에서 불과 30~40킬로미터 내외로 가깝다. 재산은 잃었어도 묘는 얼마든지 지킬수 있는 거리에 불과하여. 도사공 집안 때문에 송정공 묘를 잃었다는 추정이 얼마나 헛소리에 가까운지 알수있다. 그리고 장남 부사공 집안 멸문 후 남아있는 재산을 누군가 탕진했다면 누구 일까?

확인되지 않는 일을 추정하기 싫어서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도사공 묘가 개성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근거도 없이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가 개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도사공 집안 잘못으로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를 잃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언급하게 되었다. 물론 본인은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가 개성에 있었는지 양주에 있었는지 아니면 제3의 장소에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성장씨 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어야 정상이다. 그렇지만 양주에 있었다고 할만한 증거가 없고, 개성에 있었다고 볼만한 증거도 없다. 그래서 재산 탕진에 의한 관리소홀에 의해 잃었다기 보다, 전란중에 송정공과 전의이씨 묘에 물리적 변고가 있었고, 더욱이 그 위치를 알거나 관리했던 후손 마저 전란에 화를 당하며 먼곳 친척들은 묘소를 잃게된것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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