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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3-28 (목) 01:17
ㆍ조회: 126  
  송상기 유배기행가사 [남천록]

송상기는 본관 은진(恩津)이며, 1657년(효종8년)출생하여 1723년(경종3년) 사망하였다.

자는 옥여(), 호는 옥오재(齋)이고, 학유() 송희원()의 증손으로, 조부는 송국전(), 부친은 예조판서 송규렴(), 모친은 동지() 김광찬()의 딸이다. 1684년(숙종1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은진 종친 우암 송시열()에게 학문을 배웠고 문장 솜씨가 뛰어났다. 1697년 세자 책봉 주청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문장의 사리가 명확하여 청나라 사람들이 놀랐고, 그로인해 귀국길에 승지로 재수되었다.

뛰어난 문장 실력가답게 개인문집으로 18권 9책으로 구성된 '옥오재집'이 있으며, 그 책 권17에 남쪽으로 유배를 가며 쓴 유배가사 남천록()이 있다.

송상기가 관직생할을 하던 시기는 동인과 서인의 분당싸움이 한참 치열했던 격동의 시기이었다. 이 시기는 상소문이 채택되면 자신 뿐 아니라 소속 당파가 정권을 잡고, 잘못되면 자신 뿐 아니라 소속 당파까지 화를 당하여 죽음도 당하는 '문필전쟁' 시대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상황을 보면, 임진왜란 전 조선의 문인관료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을 하게 된다.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며, 북인이 광해군 즉위를 주도하여 한때 정권을 잡지만, 이후 서인과 남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고 북인정권이 몰락하며 다수의 서인과 소수의 남인 연합정권이 들어선다.

효종 사후 1659년(현종 1년) 1차예송 때는 서인이 우세하나, 1674년(현종15년) 2차예송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1680년(숙종6년) 남인의 영수 영의정 허적은 그의 조부 허참이 시호를 받게되어 잔치를 하는데, 그날 비가 와서 숙종은 용봉차일(: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빌려주려 했다. 그러나 허적이 왕의 윤허없이 이를 이미 가져간 것이 확인된다. 이에 숙종이 노하여 영의정 허적을 파하고, 철원에 귀양가 있는 서인계열 김수항을 영의정으로 삼았을 뿐 하니라, 조정의 모든 요직을 서인으로 교체한다. 이를 경신환국 이라 한다.

1689년(숙종15년)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 민씨는 아들이 없으나, 희빈장씨에게 아들(훗날 경종)이 태어난다. 이에 숙종은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나, 서인들이 인형왕후가 아직 젊어서 후사를 볼수 있다며 적자왕위 상속의 명분을 내세워 극렬히 반대한다. 즉 경종은 서자(庶子)라는 명분을 내세워 서인이 반대한 것이다. 그럼 숙종은 아들을 적자(嫡子)로 만들면 된다. 이에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며 서인을 쫓아내고 남인을 등용한다. 이를 기사환국 이라한다. 이때 원자의 세자책봉과 희빈장씨의 왕비책봉에 반대했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인현왕후는 서인계열 출신이고, 희빈장씨는 남인계열 출신 이었다.

1694년(숙종20년) 왕비가 된 희빈장씨는 사대부에게 금지된 무속적인 행동을 궁내에서 한다. 이런 사실이 몇차례 발칵되었고, 무수리 출신 후궁최씨(영조의 생모)가 갑자기 사망하는데 독살의혹이 제기된다. 이로써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민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킨다. 그리고 기사한국 때 사형을 당한 송시열과 김수항 등에게 작위를 내리며, 서인이 정권을 잡게되는데 이를 갑술환국 이라고 한다.

갑술환국 이후 서인이 집권한 상태에서 숙종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 경종이 즉위한다. 그런데 경종은 병약하고 아들이 없으므로 서인세력이 후궁최씨 소생 연잉군 (경종의 이복동생)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상소한다. 경종이 아들을 낳아 세자로 책봉하기 전에,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시켜서 남인을 제지하려는 서인들의 도전 이었다.  

이에 남인세력은 아직 왕이 젊어서 얼마든지 후사를 볼수 있음에도 세제책봉을 논의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하고, 더욱이 연잉군(훗날 영조)은 무수리 소생으로 세제책봉은 불가능 하다고 주장하여, 경종은 서인세력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한다. 이것이 신임사화이며 이로써 1722년(경종3년) 서인세력 송상기는 병조판서에 있던 중 전남 강진으로 유배형이 떨어지고, 1723년 유배지에서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한편 1725년(영조1년)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며, 송상기는 관직이 복원되고 시호 문정()을 받는다. 이로써 서인이 재집권 한다.

송상기가 살아던 시기는 붕당정치의 소용돌이가 거센 시기 이었다. 말년에 전남 강진 유배형이 떨어지고, 유배길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남천록이다.

남천록을 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세밀하여 역시 당대 문장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송상기는 도중에 묵었던 지명 뿐 아니라,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까지 모두 기록하는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시대 인물백과사전 처럼 보인다. 우리 진천집안 송씨가 3명이나 보일 정도이다.

송상기의 유배지 경로는 다음과 같다.

동작진 - 과천 - 수원 미륵당 - 평택 진위 - 평택 갈원 - 성환 - 천안 - 천안 덕평 - 차령 - 공주 궁원(弓院) -  정안 - 공주 호포 - 공주 경천 - 논산 주막 - 논산 은진 - 논산 오목 - 익산 여산 - 삼례 주막 - 김제 금구 - 태인 - 정읍 - 노령 - 장성 - 광주 선암 - 나주 - 영산강 - 덕진교 - 영암 - 강진

당시 송상기의 유배정착지 전라 병영은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319-1 일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송상기가 만났던 진천집안 송씨 인물은 다음과 같다.
初五日朝 到成歡 牙山倅宋秀良來見

초5일 (양력 2월20일) 성환에 도착하였다. 아산현감 송수량이 찾아아 만났다.

初九日 過五木酒幕 路逢宋進士善涵 袖傳李台士秋書

1월9일(양력 2월24일) 오목 주막을 지났을 때, 뜻 밖에 진사 송선함이 왔는데, 소매자락에서 이사추 대감의 편지를 꺼내어 주었다.

初十日 到參禮酒幕 宋掌令思胤來見

1월10일(양력 2월 25일) 삼례(參禮)주막에 도착하였는데, 장령 송사윤이 찾아왔다.

송수량은 진천송씨 18代로 송정공 10代孫이며, 충숙공 현손자(4代孫)이다. 본래 친부는 송정(宋晶)이나, 당숙부 송창(宋昌)이 서자만 있어서 양자를 갔으며, 전북 완주군 봉동읍 출신이시다. 양부 송창은 1657년(효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대사헌과 승지 판윤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다. 우리 진천집안 송씨는 39명의 문과급제자가 있지만 판서를 지낸 분이 몇분 되지 않는다. 아울러 우곡공은 진천송씨 1673년 계축보를 창보하셨다. 송수량은 대과급제나 사마시 합격은 확인되지 않지만, 양부 우곡공 諱 창이 정2품 벼슬을 지낸 덕분에 음서로 관직에 나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실록에 1722년(경종3년) 4월1일 아산현감, 1729년(영조5년) 12월28일 양근군수로 있는게 확인된다. 그러나 청렴하지 못 했는지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는 '세금을 함부로 거둬들이고 사사로이 사용했다'며 정죄(定罪)의 상소가 있었다. 이때 파직까지 당했다가 복직했는지 아니면 가벼운 처벌만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영조 때는 양근군수로 승직해 있는데, 일은 하지않고 애첩을 데리고 살며 뇌물을 받는다고 파직 당한다.

옛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 진천집안 송씨 조상 중에는 죄를 지어 비참한 인생을 보낸 분도 가끔 보인다.

우곡공의 아우 송성(宋成)이 있는데, 1699년(숙종25년) 문과에 급제하나, 답안지를 바꿔치기 했다는 부정혐의로 급제가 취소되고 제주관노로 귀속된다.  

이런 내용까지 언급하면 혹시 '무슨 자랑이냐'고 할수도 있는데, 역사적사실이라 쓴 것이고, 이를 쓴 이유는 아래에 보충설명 하기 위함이다. 한편 충숙공 현손자 중 송수형은 대과에 급제하여, 영조실록에 무려 64번이나 이름이 오르고, 승지 및 관찰사는 물론 예조참판까지 지냈으며, 다른 현손자 송수현은 비록 서자이나 공부를 열심히 하셨는지 문과에 급제했다. 이런 자랑스런 분도 충숙공 집안에 많이 있다.

아무튼 송수량은 1722년 아산현감으로 있으면서 성환에 찾아가 유배길에 있는 송상기에게 직접 문안을 드렸다.

송상기가 오목 주막에서 만난 송선함은 1673년(현종14년) 출생하고 1732년(영조8년) 사망하였다. 진천송씨 17代이며, 안성공 9代孫으로 회양공 후손이고, 부친은 통덕랑공 諱 석후이며, 충남 서천 출신 이시다. 1699년(숙종2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분의 형제가 우리 진천집안 송씨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송도함 송덕함 송대함 송윤함 송시함과 6형제인데, 6형제 중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2형제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통덕랑공 諱 석후는 생전에 아들들이 공부 잘하고 출세했다며 남부러울게 없었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이 집안은 묘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조상묘를 가로쓰기 하여 지명도 '가루골'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혹시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출세하는 묘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으면, 충남 서천의 가루골 동네를 찾아가 이분들의 묘자리를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송상기가 삼례주막에서 만난 송사윤은 1667년(현종8년) 출생하고, 1742년(영조18년) 사망하였다. 진천송씨 18代이며, 송정공 10代孫 이고, 도사공 諱 익 후손으로, 조부는 진사공 諱 시우, 부친은 생원공 諱 화 이며, 전북 익산 출신이시다. 1684년(숙종10년) 사마양시를 합격하고, 1699년(숙종2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우 송사익도 1699년(숙종25년) 사마양시를 합격하고, 1702년(숙종28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우는 1709년 37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송사윤이 급제한 1699년(숙종25년)과거는 부정 급제자가 있다는 이유로 전원이 급제취소 되었다. 그러나 1710년(숙종36년) 부정 급제자 4명을 제외하고 복과(復科)되었다. 즉 11년만에 급제가 인정된 것이다. 

숙종25년에 있었던 상황을 보면 송성이 부정급제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자신의 매형 어사주와 종친이며 동향인 송사윤을 증인으로 요청하는데, 어사주는 매형이라며 증인이 거부되고, 증인으로 채택된 송사윤은 아무런 말이 없다고 한다. 송사윤의 집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후암이고, 송성의 집은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일대로 불과 3킬로미터 내외이며, 같은 종친이고 동향이라 서로 잘 알았을텐데, 그 자리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엄청 남감 했을 것이다.

송사윤은 1710년 복과되어 낭서를 지내고 1717년(숙종43년) 1월12일 사헌부장령에 재수된다. 복과로 관직에 나가고 불과 8년만에 사헌부 장령으로 초고속 승진한 것이다. 아마 소속 당파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1월20일 우암공 송시열의 부친 송갑조의 벼슬을 추증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또한 2월6일 강욱이 일 처리를 잘못했다며 죄 줄것을 상소한다. 그러나 곧바로 조관빈으로 부터 "송사윤은 성질이 용렬하고 문벌이 한미하여 본래 명망이 없는데, 겨우 낭서(郞署)를 지내고 갑자기 장헌(掌憲) 벼슬을 차지하였으니 개정해야 한다."는 역공이 들어온다. 이에 숙종은 개정을 거부하는데, 아마도 송사윤이 강욱의 처벌을 올리자, 강욱과 친분이 있던 세력이 맏받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송사윤과 조관빈은 모두 서인 당파헤 속하는데, 당파 내부에서 경쟁이 있었던 것같다.

조관빈의 상소를 보면 송사윤은 문벌이 한미하다고 하는데, 그 조상 내력을 보면 알수있다. 10대조 송정공은 고려 우왕2년 문과급제하고, 조선에서도 형조참의를 지낸다. 9대조 諱 익은 개성부 도사와 군수를 지냈으며, 8대조 諱 의(依)는 통례원 통례를 지냈다. 7대조 諱 찬은 진사, 6대조 諱 옥은 생원, 5대조 諱 현은 장사랑, 고조부 諱 경운은 유생, 증조부 諱 의(宜)는 유생, 조부 諱 시우는 진사, 부친 諱 화는 생원 이었다. 즉 10대조는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는 고려 우왕 이고, 9대조와 8대조가 고위관직에 있었으나, 이분들은 문과급제자가 아니다. 따라서 조선에 들어와 9대조 부터 부친 사이에 문과급제가 없었다. 조관빈의 상소에서 '문벌이 한미하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송사윤이 성질이 용렬하다고 하였는데, 벼슬을 시작하고 불과 8년만에 낭서에서 사헌부장령으로 고속 승진을 한것을 두고 주변에서 시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당시 송사윤은 처음에 장령에 임명되는 것을 사양했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자 마지 못하는 척하며 헌부에 출입했다고 기록되 있는데, 아마도 문벌이 약한 출신이 갑자기 출세하자 배아퍼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고속 승진 배경에 당파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 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실록에는 없지만 다른 기록을 보니 -무엇인지 기억은 안된다- 송사윤이 숙종과 독대하며 크게 웃고 목소리가 컸다고 하는데, 송사윤은 호탕한 성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겸손하지 못하고 건방지다는 평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사윤은 1717년 1월12일 사헌부 장령에 재수 되는데, 1722년 송상기가 유배를 갈 때 서울근교에서 문안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 근처인 전북 완구군 삼례읍 주막에서 문안을 하였다. 과연 서울에서 그먼 곳까지 내려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송사윤은 1718년(숙종44년) 12월10일까지 사헌부 장령으로 있었으나, 이후 실록에서 보이지 않고 1726년(영조2년) 2월20일 갑자기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보인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앞에서 설명한 사화로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주고받을 때, 송사윤이 유배를 가거나 파직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계에서 지방관리로 좌천된 것으로 보인다.

부친 생원공 諱 화와 장령공 諱 사윤 묘는 전북 진안에 위치하는데, 우리족보 행장문은 장령공이 여려 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그럼 송사윤은 1719년부터 1726년 사이 붕당의 정권교체 영향으로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부모님을 모시고 지방군수로 내려갔고, 전북 진안군수를 하던 시절 부모님 상을 당한 것이다. 따라서 1722년은 진안군수에 있을 때 이므로, 송상기가 유배간다는 소식을 듣고, 전북 완주군 삼례읍 주막까지 문안을 간 것이다.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이 있다. 충숙공의 증손자 송성은 1688년(숙종10년)에 있었던 문과에서 답안지를 바꿔치기 하는 부정급제로 제주관노에 귀속되었는데, 정말 부정이 있었을까? 그로인해 급제자 전원이 취소되나 어째서 11년만에 4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복과가 되었는지 의문이다. 송성이 시험장의 부정행위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이는 붕당의 회오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 아닌지 모르겠다. 송성의 증조부는 충숙공 諱 영구인데, 충숙공은 붕당사에서 큰 획을 그은 분이다. 서인은 기호학파로 서울 경기 충청지역에 해당하고, 동인은 영남학파로 영남지역이 해당하는데, 본래 호남지역은 양쪽 학파가 혼재하였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은 전북 전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기호학파 이었으나, 훗날 영남학파의 학풍을 이어받아, 자신의 스승 이이를 비난하고 이황을 따랐다. 그 이유로 선조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았는데, 이렇게 16세기 무렵만 하여도 호남은 아직 주기론과 주리론이 혼재하였으나, 충숙공 諱 영구를 기점으로 호남 유학자들이 서인세력에 정착하였다. 즉 충숙공에 의해 호남지방도 서인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송성의 큰형이 송최인데, 그는 현종 때부터 정언으로 있으며, 남인세력을 견제하고 유배하거나 좌천된 서인세력을 옹호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다 금성현령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니 상대편 당파에서 송성이 곱상하게 보일리 없다. 명확하지 않지만 숙종10년의 급제자 전원 취소는 붕당의 대립과 연관있지 않나 생각되나, 숙종실록은 송성이 몰래 답안지를 교체하여 부정급제 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정사에 기록된 대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 급제가 취소된 11년 후, 제주관노로 귀속된 4명을 제외한 사람들은 다시 복과하는데, 4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 사이 풍토병으로 사망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송상기의 옥오재집에 보이는 유배가사 [남천록]을 통해 우리 진천집안 송씨 3분을 알아보았다. 송상기는 유배를 떠나고 그 다음해 1723년 사망한다. 그리고 1725년 영조가 즉위하며 그의 관직은 복원된다. 2년만 더 살았으면 관직을 되찾고 눈을 감았을텐데 이분에게 아쉬운 부분이다.

송상기는 유배길에서 만난 진천집안 송수형 송선함 송사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웠는지 서술하지 않아 대화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우리 족보에서 장령공 諱 사윤의 세주를 살펴보니 1책의 유고집이 있다는데, 과연 장령공은 송상기가 유배를 가던 때, 전북 진안군수로 있으며 삼례 주막까지 문안 인사를 했던 그날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궁굼하다. 그러나 장령공 諱 사윤의 유고집이 전하지 않아 아쉽게도 지금은 알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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