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 할아버지 찬양문 (작성자 송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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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할아버지 찬양문 (작성자 송관규)

송은도 0 4055
 
2007.  4. 26 (목) 14:34  송관규 종인께서 대종회 옛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 입니다. 작성자는 광기로 되어 있으나, 홈페이지에서 사용한 대화명 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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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肅公 諱 英耈 贊揚文  (충숙공할아버지 찬양문)


 

1620년 8월 左參贊 宋俊吉 씀

옛날에 나는 公과 더불어 조정에서 죄를 얻게되자 함께 유책을 당한 끝에 쫓겨

난 일이 있었다.

나는 기용되어 연경 (현 북경)을 가게 되었는데, 公은 오히려 교외에 은거하였으

므로 술 한 병을 차가지고 가서 遠行(원행 : 먼길을 떠남)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公이 靜養(정양 : 몸과 마음을 요양함)하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였는데

公은 내가 먼 곳에 가는 苦役(고역)을 걱정한 나머지 서로 슬퍼하면서

작별을 했는지라.

내가 살아서 돌아 왔을 때는 公은 땅에 묻힌지 이미 석달이 넘었었다.

기간이 얼마되지 아니한 사이에 이미 천고의 외로운 인간이 되었으니

누군들 지기의 벗인 줄 알았으리요
 

卒世 하였으나 棺(관)에 기대에 한번의 통곡을 하지 못 하고 장사를 지냄에

상여끈을 잡지 못 하고 송별을 하여 幽明(유명)의 길이 이다지도 永訣(영결)을 하

고 말았으니 어찌 한마디 말로서 그치리요

행장을 살피니 공의 諱 는 英耈(영구)요 字는 仁叟(인수)라

鎭川宋氏로써 고려조에 들어와서 諱 愚는 청아한 선비로서 큰 벼슬을 지냈는데

號는 松亭이라

그 손자인 善文은 일곱 번 과거를 보았으나 등제하지 못하고 處士(처사)로서 일생을 마치다.

諱 世雄 은 좌통례로 贈職되어 諱 億壽를 낳으니 좌승지로 증직 되었는데

靜庵(정암 조광조)의 아우인 牧使(목사) 조종조의 女에게 장가들어 諱 翎(령)을

낳아 이조참판으로 증직되니 바로 공의 부친이라.

처사공 (諱 선문)으로부터 참판공 (諱 령)에 이르는 동안 顯達(현달) 됨직한 이인

데도 막혀져서 모두 가훈을 世襲(세습)하여 행실을 가다듬었으므로 가문이 명성

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여 세상에서 이름난 氏族으로 일커렀더라

妣(비)는 진주 河씨로 영의정 문효공 인의 후손 사혈서령 世濬(세준)의 女라

公은 嘉正(명나라 연호) 1556년 (명종11년)에 태어나니

어려서부터 재질과 슬기가 무리에 뛰어나서

158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에 뽑혀 注書(주서)를 拜命(배명)하였는데

벼슬의 임기가 만료되자 규정대로 승진하여야 할 차례인데도

고모부인 柳根(류근 1549∼1627 자는 서동 또는 고산 진주인晉院府院君)이 이

조정랑에 재직하고 있었기에 親謙(친겸 : 친척이라 꺼리는 일)의 자리라서

西班(서반 : 무관) 벼슬인 司果(사과)가 되어 1587년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고 얼

마 아니되어 연거푸 모친상을 당하여

전후 완산에서 한산하게 살았으니 6년 동안이라

1592년에 松江 鄭相公 (정철)이 都體察使(도체찰사)가 되자 공을 천거하여 從事

官(종사관)으로 삼고 예조좌랑을 배명하자 병사 1,000명을 모아 곧장 行左所(행

좌소 임금이 거동할 때 묵는 곳)로 달려가던 도중 侍講院司事(시강원사사)로 除

授(제수)한 기별을 듣게 되자 바로 幕僚(막료 : 참모 또는 부관)에게 병사를 넘기

고 戰亂(전란)에 軍騎(군기)를 몰아 적의 소굴을 뚫고 간신히 행궁에 다달에 正言

(정언)으로 옮겼다가 持平(지평)으로 개직되어 성절사의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황조에서 서울로 올라오니 완산으로 귀향 하였는데,

세 번 지평이 되고 거급 헌납이 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아니하고

1599년에 충청도사(忠淸都事)가 되어 舟師(주사 : 水軍)를 관장하여

쓸모없이 낡아빠진 것들을 보수하여 일으키니 軍民이 신뢰하게 되자

巡察使(순찰사)가 그 상황을 조정에 알리게되어 한 해 동안 더 재임하였다가

직에 들어와서 지평 겸 文學이 되었는데

갑자기 이조좌랑을 배명하였으나 정부의 천거로 檢詳舍人(검상사인)로 나갔다가


얼마 아니되어 司諌(사동)을 배명하였으나 言事로 청풍군수로 나갔다가

1604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니 大同察訪(대동찰방)으로 좌천되어

한 해를 넘기도 신병으로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다시 星州牧使(성주목사)가 되었

다.

그때에 정인홍(1535∼1623)이 盜名(도명 : 부당한 명성과 영예를 탐내는 자)을

띠고 고을에 廣行(광행)하니 목사로 이 고을에 赴任(부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를 방문하여 사사건건이 숙의를 핝 후에야 공사를 처리하게 되었는데 公이 부임

하여서는 절대로 찾아보는 일이 없었으며

그 족속으로서 세력을 빙자하는 자를 묶어들여 형벌로 다스리니

그 무리가 크게 놀란 것이 원인이 되어 파직하게 되다

1610년 弼善 司諌 輔德 承旨(필선사동보덕승지)로 敍用(서용) 되었다가 좌부승

지로 승진 되었는데 병조참의와 參知(참지)로 승진되다

얼마 아니되어 大司諌(대사동)으로 옯겼다가

경상도 관찰사를 배명하여 정사를 성공하고 조정에 돌아와 성절사로서 연경에

알현하니 때에 황조가 바야흐로 본국이 일본과 왕래하는 것을 의심하다

公은 글을 올려 간절히 변명하여 밝혀내게 되니 禮部(예부)가 이를 嘉納(가납)하

여 秦上(주상)한 바 모두를 允許(윤허)하게 되다

조정에 복명하게 되자 이와 같은 노고로 嘉善(가선)에 올라

同志中樞府使(동지중추부사)를 배명하고 1616년 병조참판을 분담하게 되다

때에 불충한 신하들이 국명을 천단하매 공의 명망을 무겁게 여기어서

기어코 끌어당길 생각으로 나날이 졸라 댔으나

공은 바로보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문을 닫고 深思하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볼수 없었다

폐모(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西宮(서궁)에 유폐하여 서인으로 대우함) 논쟁이

벌어지자 모든 관료들은 조정에서 분쟁을 일으키니

公은 반항하는 언사로 강력히 이를 배척하고 시종 참여하지 아니하나

흉악한 무리들은 집에서 秦上(주상) 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公은 樞府郎(추부랑)에게 글을 보내어 이 일은 모름지기 의리에 관여된 일이니

충분히 강구하여야 할 일이라 했다

대관들이 합의하여 멀리 귀양 보낼것을 논의하니

公은 그날 동쪽 교외로 나갔는데 울분한 나머지 병이 들어 3년만인

1620년(광해12년) 5월 2일 여관에서 졸세하니 춘추65세라

1623년 인조반정이 일자 인조께서는 예조판서를 추증하고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시다

公은 風神이 秀明(수명)하고 의논이 정직하고 성질이 介剛(개강)하고 방정하여

사람의 과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엄중하게 여겼다

처음 지평이 되자 嬖人(폐인 :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하므로 公은 이를 옥에 가두었더니

대사헌이 公에게 이를 늦춰 줄 것을 누누이 간청한 지라

公은 말하기를 “나는 석자 밖에 안되는 법률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침내는 중

벌로 다스릴거라”하다

權貴(권귀 : 권력이 있고 귀한)한 자가 성냄 끝에 음해를 끼치니

마침내는 모든 사람이 회피하는 연경에 가게되다

청풍 대동 성주 등도 그와 같은 일로 나가게 되었으니

때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으나 公 은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봉직하고 궁핍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다스렸으니

백성들은 따랐으나 아전들은 두려워했다

세금을 줄이고 부역을 때에 맞도록 하니 관민이 유족했다

관찰사가 그 치적을 조정에 주상하여 거듭 포상을 내리다

깔끔히 다스리고 힘써 연마하고 돈독히 행동하고 효도하고 도의를 권장 하였으

나 가족이나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여 처자들은 늘 飢寒(기한 : 춥고 배고픔 )으

로 고생스럽게 보내도 태연했다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기를 좋아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 주었으니 있고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친족 가운데 자립할 수 없는 사람은 館(관)에 거두어들여 구호 하였으니

己出子女나 다름 없었다

1597년 왜란에 적병이 배후에 있게되자

公은 재종형의 아들이 나이가 여섯 살이고 서제의 아들은 세 살 이었다

公은 이 아들들이 걷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 앞에 꺼안고 등에 업으니

말이 무게에 견디지 못 하여 달릴수가 없었으나 말에서 내려 놓지 못 하니

지켜보는 사람이 감탄했다

부인은 海平尹 씨로 宗簿正(종부정) 承慶의 女라

현숙하여 부덕이 있었는데 公이 졸세한 5일에 앞서 완산의 농가 집에서

졸세하여 공과 더불어 합장하니

완산 고을의 북쪽 紆州(우주) 옛고을 서쪽 酉座(유좌)에 卬向(안향)의 언덕이라

사자가 없음으로 재종형의 아들 興詩가 입계하니 官은 현재 殿中(전중)이라

司諌 未能 (사동 미능제) 최상중의 女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 딸 세 사람을 두었

는데 어리다 측실의 아들은 여섯이니 흥목, 흥녹, 흥정, 흥축, 흥관, 흥송이고


딸은 세사람이라 殿中君 (전중군 : 양자 흥시)이 내게 말하기를 “부군께서 평소

에 말씀 하시기를 白沙(백사) 李公 (恒福 항복) 秋浦(추포) 黃公 (진), 月沙(월사)

李 公 (延龜 연구)는 나의 벗이라” 하셨는데 오늘에 모두 작고하시고 공께서 (월

사) 홀로 생존하시니 不朽(부추)의 託(탁-碑鉻(비낙 : 비석에 글을 세김))은 어른

께서 맡아 달라는 것으로 삼가 돌을 다음어 놓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나는 굳이 公의 명을 차마 엮지 아니하려 해도 명을 엮지 아니 할수 없는 지라

마침내 눈물을 숨기고 序文에 이어 鉻(낙 : 비석에 세김) 하도다.
 

天品이 剛直하사

진퇴가 法度로 웠네

공은 오직 타고난 품성

검어지거나 닳지도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가

몸소 실천 하였네

얌전하지만 豪氣(호기)는 숨길 수 없어

큰 명예를 탐내지 않고

恩巃(은릉)을 입어 御蓸(어조)에 들어

티끌 만치나 놀랠 것 없고

察訪(찰방) 직책으로 내몰려 恥辱(치욕)되어도

낮은 곳으로 가는 일을

영예롭게 여기었도다

매우 어려운 시국을 만나

혼탁한 세상에 숨어서 벼슬 살도다

더듬어서 말하지 않고

문을 닫고 앞일을 謝絶(사절) 하도다

한 줄의 글을 奏上(주상)하니

만고의 綱常(강상) 이러라

東門에 말을 달리어

씁쓸한 변방에 숨어 벼렸네

위태로운 조정에 우뚝 서있어

그 志操(지조) 변치 하니했으니

진실로 완전한 사람일 진대

天度에 가까 우리다.
 

★충숙공 할아버지(14世)는 圭 항렬 기준 13代祖

   충숙공 파조

   송정공 할아버지(8世)의 6代孫

   찰방공 할아버지(16世)의 할아버지
 

★우산종중(완주군 봉동면 제내리)에서 모시고 있으며

   시향은 매년 한식일에 찰방공 할아버지와 함께 모신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1613년 경상관찰사를 마치고 還朝(환조) 할대 從婢(종비)가 가져온

   路糧(로양:식량)과 三拓扇(삼척선:부채)을 발견하고 官物이라 하고 크게 꾸짖고

   낙동강에 던졌다 하여 그곳을 投扇江(투선강)이라 傳해온다.

 
 


 

 네이버 카페에서 확인되어. 우리 대종회 홈페이지에 가져왔습니다.

 위 글은  충숙공 13代孫 관규 종인께서 쓰신 글 입니다.  
 
 
宋俊吉

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은진(恩津).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영천군수(榮川郡守) 이창(爾昌)의 아들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대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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