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 할아버지 (작성자 송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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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할아버지 (작성자 송관규)

송은도 0 4107
 
좋은 글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정신세계를 맑게 해줍니다.
네이버 카페를 찾아보니, 오래 전에 좋은 글이 있어 여기 이렇게 다시 올려 봅니다.
 
작성자 : 송관규   작성일 2007. 05. 01. (화)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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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할아버지 (諱 英耉, 圭항렬 13대조)
1556(명종11) - 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 호는 표옹(瓢翁) 일호(一瓠) 백련거사(白蓮居士) 
아버지는 영(翎) 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4년(선조 17) 유학으로서 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사과(司果) 등을 역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정언을 거쳐 지평으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완산에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9년 충청도 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정랑 사인 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필선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행사직(行司直)으로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하였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객사중에 가장 오래된 전주객사(고급 호텔급)는 조선시대에 건축하고,
1471년 중건한 것인데 정문에 가로 466㎝ 세로 179㎝의 풍패지관(豊沛之官) 이란 현판은 중국인 사신 주지번이 쓴 글인데
이에 얽힌 사연으로 송씨 집안이 호남의 명문으로 알려졌다.
 
표옹 송영구의 문집에 따르면 표옹은 38세 때인
1593년 송강 정철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는데 불목하니가 남화경을 읊고
있는 것이 신기하여 내력을 알아보니
이름은 주지번이요 과거에 수차 낙방하여 노자가 떨어져
고용인 생활을 한다 하여 표옹이 중요한 서적 몇권을 필사해 주고
답안작성 방법과 학자금 까지 주었는데
주지번은 2년후 (1595년)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기던 중
1606년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개인자격으로 송영구를 방문 가면서
전주 객사의 글을 적게 되었고
13년만에 표옹을 만나 희귀한 책 80여권을 드렸는데
후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표옹의 집으로 다녀간 흔적은 망모당(望募堂)의 편액과
표옹의 묘자리를 잡아준 것 이라고 한다.
장암에 있던 표옹의 저택 본채와 사랑채는 사라지고
현재는 표옹의 선친이 선영을 망모하기 위하여
1607년에 지은 별채이자 공부방이던 망모당만 남아있는데
정면 세칸 측면 세칸의 필작집이다.
 
표옹은 52세때 성주목사를 지냈고
56세때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임기동안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고 하며 경상감사를 마치고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에 닿았는데
나루까지 전송한 이방이 "어르신이 경상도에 계시다가 가져가는 것은 손부채 하나 뿐이라"고 했더니 부채 마저도 낙동강에 던져 낙동강을 투선강이라고 하였고
부채를 던진 나루가 투선진 이라고 불린다는 말이 송씨 문중에 전해 내려와
송씨들의 정신이 되어 표옹의 손자 송창(공조판서)은
유언에서 세가지를 금했는데 만장을 쓰지말고
비문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했다.
 
표옹의 12대손 송병순(72세)씨는 재무부관세국장, 국민은행장,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지금은 대만과 합작회사의 회장으로 있는데
2000년 12월에 발간한 회고록 첫머리에 표선진의 일화를 소개하고
은행감독원장으로 재직당시 프로판가스가 터져 부인이 중화상을 입었는데
치료비가 없어 은행융자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중에서
돈을 모아 보태고 사돈집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 갔다고 한다.
 
호남고속도로 익산인터체인지 부근의 진천송씨의 선산은
400년된 소나무들로 덮여 있게 된 유래는
삭녕최씨 최항(용비어천가를 주해함)의 후손을 며느리로 맞을 때
친정아버지 최상중이 시집갈 때 무엇을 준비해 줄까하고 딸에게 물었더니
변산솔씨(궁궐용 목재의 씨앗) 서말을 달라고 하여 심었다고 하며
이 며느리가 시집와서 백자(白子)편이란 떡을 만들어 전통으로 전해오는데
흰떡 수십개를 부챗살처럼 동그랗게 모아놓고 계속 7층 정도 쌓아
행사가 끝나면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데
지금도 문중 시제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라고 한다.
 
표옹이 망모당을 지을 때 인근 50리 내 관아에서 기둥과 서까래 등을
기부한데 대한 보답의 행사로 시작된 소쇄일 행사는
음력 7월16일(백중 다음날) 망모당에서 집안이 모여 청소 후
함께 식사도 하고 인근 선비들을 초청해 백일장도 열린다고 한다.
 
 
<위 글은 충숙공 13代孫 관규 종인이 작성한 글입니다.> 
 

우산정사에 모셔진 표옹 할아버지의 영정을 여기 전자통신 공간에 재차 올리며, 그 분의 후손이 쓰신 충숙공 전기문을 아래에 덧붙여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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