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종중 한식 시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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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종중 한식 시향이

송병혁 0 4024

  예복을 갖춘 헌관(獻官)만도 이십여 명에 백여 제관들이 원근각지에서 옛 이름 우주골 한식시향으로 4월 6일에 모였다. 우산종중 대종(紆山宗中 大宗)은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서 묘제(墓祭)를 올린다.

  표옹공(瓢翁公)의 조고(祖考) 승지공(承旨公 億壽) 제례에는 병욱(炳旭) 족형(族兄)이 홀기(笏記)를 읽으므로 시작되었다. 놀라운 변화이다. 작년 가을시향 때부터 종중의 오랜 한문(漢文) 홀기를 국역하여 한글로만 읽기 시작하였으니 이번이 그 두 번째였다. 모두가 알아듣기 쉬운 표현이라 참여자들이 잘 따를 수가 있었다. 마치 라틴어 미사(mass)를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에 이해하기 쉬운 토착 언어로 예배(聖祭)하게 하므로 현대화한 경우와 비견하겠다.

  연장자인 병렬(炳烈) 족형이 초헌관이 되고, 독축(讀祝)은 아직도 한문을 그대로 수용하는데 아마도 점차 변화되리라 여겨진다. 한글세대로 한문을 공부하지 않았으니 대개는 축문(祝文)의 내용을 납득하기 어렵다. 독축도 토를 달아 읽다보면 한자의 뛰어 읽기가 어색하여 자칫 그 뜻이 엉뚱하게 달리 들리는 경우도 보게 된다. 하기는 잘못 읽는 자체조차도 대개는 모르니 국문으로 읽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혹시 옛 전통을 따라 무게를 실리기 원한다면 한문과 국문 축을 연이어 읽어도 된다, 불과 2, 3분이 더 소요될 뿐이니까.

  다른 진송 묘제와는 달리 보다 더 전통적인 격식이 특이하다. 제수도 한 분상에 거의 2백여만 원이 소요될 정도로 정성을 다했는데 타에 견줄 때 월등한 진수(珍羞)가 아닌가. 꿀과 생강 등 다른 곳에서보다 가지 수도 훨씬 더 많고 적(炙)도 여럿이며 생선 틀만 해도 장정이 혼자는 힘을 들여서야만 운반할 정도이다. 제물은 소형 트럭과 경운기로 운반하였다. 산신제에서도 돼지머리와 갖춘 제물이 푸짐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충숙공(忠肅公 英耈/ 1556-1620) 제례에는 호중(鎬仲) 평의회 의원이 홀기낭독으로 사회를 보고, 재헌(在憲), 일한(一漢), 호림(鎬林) 족인이 집사로 시중했는데 전에 자주 하던 집사자(執事者)를 이어 수고하였으니 다양한 참여의 기회인 것 같다. 초헌관은 재규(在圭) 평의회 의장이, 독축에는 중규(重圭) 평의원이었다. 아헌에 병래(炳來), 종헌에는 진산공(珍山公 有佺) 문중으로 안양대학교 경영학 교수인데 주중에 특별히 시간을 내서 참여한 준호(晙豪) 족질이, 유식(侑食)에는 익규(益圭) 평의원이 첨작(添酌)을 했다.

  표옹공의 사자(嗣子)이며 단성현감을 지낸 단성공(丹城公 興詩/ 1586-1649)과 배위(配位) 삭령최씨(朔寧崔氏) 묘제는 바로 앞의 그 삼자(三子)인 찰방공(察訪公 有光) 제사와 동시에 올린다. 제관도 많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찰방공 후예는 직계에, 다른 이들은 모두 단성공 묘소에 참례를 했다.

  재규 평의회 의장은 특별히 삭령최씨에 대한 친정의 일화를 제관들에게 소개하면서 솔 씨 한 말을 친정에서 가져다 심은 그 소나무들이 지금까지 선산에 자라고 있음을 상기하였다. 문중의 중흥을 이룬 할머니의 슬기를 새삼 후손들이 기릴 수가 있었다.

  제파(祭破) 후에는 우산정사에서 장학금 전달식이 있었는데, 대학생 34명과 고등학생 9명으로 도합 43명에게 각각 장학증서와 1백만 원씩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호남(鎬男) 유사의 사회로 진행되어 학생이나 학부모가 앞으로 나가서 받았다.

  재규 의장은 전달식에서 '우산종중의 장학제도는 실상 표옹공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주지번(朱之蕃) 장원(壯元)에게 장학금을 도와준 선례가 그 시초로 설명할 수 있다'며 뜻 깊은 가치를 환기하였다. 4천여만 원의 장학금액은 타 성씨나 문중에도 손색이 없으리라 여기며 우산종중의 선조님들 덕택임을 기억하고 마침내 훗날 종중을 위해 뛰어난 인재들로 성장하여 나라와 문중에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찰방공 후손은 대개 소종 재실로 가서 점심을 들고, 그 외의 제관은 우산종중 대종 재실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반주로 비빔밥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옛 전통을 따라 음복(飮福)을 나누어 싸서 한 보따리씩 참여한 모든 제관들에게 봉송(封送)까지 챙겨주었다. 지금은 보기 드문 전통이라 우산종중의 깊은 유래와 전통이 더욱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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