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漣川) 묘제(墓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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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漣川) 묘제(墓祭)에서

송병혁 0 3994

  선조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보본반시(報本反始)는 우리의 오랜 전통으로 제례(祭禮)에서 잘 나타난다. 나의 존재는 그 근본이 선조가 먼저 계셨기 때문이니 그 은혜 감사하는 마음이 인간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4월 3일은 내게로부터 19대조 서령공(署令公 琳), 18대 송정공(松亭公 愚), 17대 판결사공(判決事公 翠)의 연례 시향(時享)일이다.

  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연천(漣川)으로 가는 화창한 봄날이 조상의 은택처럼 화사하였다. 마침 주말이라 당질(堂姪) 내외가 나를 태우고 포근한 봄나들이처럼 선영(先塋)으로 가는데 전자 네비게이터(Navigator)가 말을 잘 안 들어 다 가서 그만 길을 잃었네. 물어볼 사람도 드문 시골길을 헤매다가 약간 늦이 도착하였네.

  이토록 따뜻한 날씨에 많은 후예들로 둘러싸여 얼마나 선조님들의 영령이 기쁘실까, 내 마음조차 풍성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처음 참사하는 당질에게도 뿌듯하게 느껴진 게 썰렁한 분위기보다 많은 제관에 화창한 날씨였으니까. 4년 째 내리 왔지만 금년에 제관(祭官)이 가장 많았다. 충민공(忠愍公 圖南) 종중의 의섭(義燮) 아저씨가 세어보니 65명이었다네.

  도사공 종중에서 1, 교하공 22, 충민공 4, 공주공 1, 여전히 충숙공에서 가장 많았다.  송정공파에서 대종회를 대표하게 된 재규(在圭) 신임회장도 참사하여 분위기를 중후하게 하였다. 반갑게도 평규(平圭) 안성공파종회장이 참여하고 여러 해째 해마다 재훈(載勳) 참의공파종회장이 또 참석하여 타파 2, 제수(祭需) 차리는 4명 등, 모두 따뜻한 봄날에 판결사공 선산을 가득하게 하였다. 날씨도 좋았지만 아마도 모처럼의 주말이 되는 바람에 조금 젊은 층이 전보다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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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공종중 제관들: 호석 총무 촬영)

  더더욱 기뻤던 것은 교하공(交河公) 종중에서도 이제껏 가장 많았다. 버스를 안동에서부터 대절하여 새벽부터 근 6시간을 달려왔다.  서울에서 우리 셋을 더하여 22명이었으니 신임 병오(炳午) 종중 회장의 지도력이 돋보이게 되었다.

  세 번째 올린 판결사공 제사에는 장남 교하공(交河公 善忠)의 종중이 장손(長孫)이라며 재식(載植) 아저씨로 하여금 초헌관(初獻官)이 되게 하였다. 다섯 위(位)의 제사가 다한 후에는 22명의 제관들이 판결사공 묘소 앞에서 사진을 찍어 우리가 기념을 남겼다. 더 많은 제관들이 참여하기를 바라며 우리 문중부터 노력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당질 내외와 고향의 우리 당내 주손(冑孫)인 재당질(再堂姪) 대규(大圭)에게도 전화를 해서 꼭 참사하도록 미리 협의를 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겠지.

  덕상(德相) 족숙이 홀기를 처음으로 읽으며 진행하여서 질서가 좋았다. 따님만 두셔서 후사(後嗣)가 없는 판결사공 제씨(弟氏) 정선공(旌善郡守 翯)의 마지막 제사에는 축문이 조금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첨소봉영 불승감모(瞻掃封瑩 不勝感慕)”는 좀 어색한 것 같다. 직계(直系)가 아닌 송정공의 넷째 아드님이라 제사를 함께 모시는데 ‘사모하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라는 표현이 조금 그럴지 않은가?

  대개의 축문이 고식적(姑息的)으로 남이 하던 식을 베껴다가 날짜와 대수관계만 바꾸어 그대로 한글 토를 달아 읽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기가 쉽기는 하다. 그러나 직계조상일 경우조차도 그토록 사무치는 사모의 마음이 넘치기가 어려운 기백 년이 지났고, 어느 방조(傍祖)인지조차도 잘 아지 못하는 모처럼 참여한 이들에게는 그런 표현보다는 조금 더 완곡하고 진솔하게 바꿈이 적절할 것 같다.

  안타까운 마음 올 때마다 갖게 되지만 진송 인구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송정공 후손이 많은데 재실(齋室)이나 옛 재궁(齋宮) 같은 집 한 칸이 없어 우리는 제파(祭罷) 후에 점심을 모두 비닐하우스 온실에서 벽돌을 깔고 앉아 어수선하게 나누어야 했다. 그래도 시장하던 차에 비록 스티로폼(styrofoam) 일회용 접시에나마 한 번 더 갖다 먹는 이가 여럿이었다. 우리 송정공 후예들 중에 재실을 작게라도 하나 마련할 만한 재력가(財力家)가 언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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