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옹공 영정 봉안식 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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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옹공 영정 봉안식 참례

송병혁 0 3893

  호남(鎬男) 우산종중 평의회 유사의 사회로 시작한 영정봉안 기념식에서 재규(在圭) 평의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진천 송씨에서 처음 있는 선조의 영정을 제작 봉안하게 되어 기쁘다며 축하 행사에 참여한 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대종회와 각 파종회, 각계에서 보낸 큰 화환을 우산정사에 가득 진열한 가운데 그 간의 영정 제작 과정을 병국(炳國) 평의원이 보고했다. 2년에 걸쳐 여러 번의 회의와 자료수집, 화백선정, 협의와 고증, 감수와 확인 등의 많은 노력을 들였고, 영정 모사와 영정을 건 상자 틀 역시 최우수 홍송(紅松)을 골라서 오래 보존될 수 있게 했다. 표옹공의 다른 아호(雅號)인 백련거사(白蓮居士)의 의미를 살려서 연꽃 조각도 새기고 명인(名人)인 특별기능인에게 주문하고 오랜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다.

  제막식에는 백진(百鎭), 병광(炳光) 대종회 고문, 파종회장 및 우산종중 평의회장이 준비된 줄을 함께 당기므로 영정의 덮은 막이 오르자 참여한 모든 분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감격적인 표옹공(瓢翁公 英耈)의 영정을 처음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사모(紗帽)에 붉은 관복(官服)의 전신 영정(全身 影幀)의 위엄스런 모습에 생동감이 감돌았다. 새로운 공(公)의 이미지(image)를 새기자며 재규 의장은 참여자들에게 1분간 영정을 집중적으로 첨앙(瞻仰)하자고 제안하였다.

  영정 우측 상단에 작게 쓴 제자(題字)에는 잘 쓴 글씨로 ‘경상도관찰사 표옹공 송영구 영정(慶尙道觀察使 瓢翁公 宋英耈 影幀)’이라 하였다. 이를 완성한 채 화백(蔡 畵伯)의 직접 설명에 따르면 가장 오래 보존될 수 있는 고품질의 한지(韓紙)에다 그렸다네. 제자(題字)마저도 격에 맞도록 명필의 손을 빌렸다. 옛 완주(完州)지역에서 나온 표옹공의 측면 스케치를 참조했고, 공의 후손 30여 명의 사진을 바탕으로 가장 공통점이 되는 모델의 평균치로 하여 착수했다고 한다.

  대개 상반신의 경우가 많은데 전신영정으로 크게 한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이번에 표옹공 영정을 그렇게 함으로 품위를 돋보이게 했다. 당시 표옹공과 가장 친했던 친구 중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추포 황신(秋浦 黃愼)의 영정은 생전에 그려서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나도 여러 차례 그 분들의 전신영정임을 보았던 터이다. 이로서 표옹공도 거기에 비견할 때 손색이 없어 나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감격스러웠다.

  영정 봉안제에는 윤규(胤圭) 평의원이 홀기(笏記)를 읽으며 사회를 하고 집사에 병국(炳國) 평의원이 봉사하고, 헌관은 재규 의장이었다. 주과포(酒果脯)로 색상을 갖추어 서품(庶品)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말석에 끼인 나까지도 음복에 참여하였으니 영광스러웠다.

  높은 관직과 고매한 인품의 표옹공께 올리는 제사라 품위를 갖추어 축문도 고례(古禮)를 지켜 한문(漢文)으로 무게 있게 호중(鎬仲) 평의원이 독축하고, 신세대를 위하여는 한글번역문을 중규(重圭) 평의원이 다시 읽으므로 그 의미를 모두가 새길 수 있어서 색다르고도 도움이 되었다.

  축문은 대략 위대하신 부군께서 절의(節義)를 다하셔서 만고강상(萬古綱常)이란 칭송을 받으셨으나 390년이 지나도록 영정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삼가 모사하여 봉안하게 되었음을 고하고, 우러러 후손들이 위엄하신 모습을 길이 흠모하게 될 것이라 삼가 아뢰며 제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버스 한 대를 대절하였고, 안동에서 소형버스 한 대, 그리고 춘천과 서울, 용인 전주 등지에서 개인적인 차량으로 참여한 100여 명의 하객들이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내빈들에게는 기념 타월과 거마비 봉투까지 곁들여 접대를 했으니 그 정성 또한 대단하였다. 고급 도시락을 주문하여 점심으로 대접했고 소주와 맥주를 공궤하였으며, 식사 후에는 표옹공 산소와 망모당으로 안내하여 재규 회장이 친절하게 의미 있는 설명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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