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독립운동가 해창 송기식 선생과 하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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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독립운동가 해창 송기식 선생과 하락정

송창환 0 2402




하락정(河洛亭)
■소재지 : 안동시 송천동
■소유자 : 송시익(宋時益)
■규모 : 1동

♧문화유산 안내
하락정은 해창 송기식 선생의 강학공간이었던 봉양서숙과 인곡서당을 합해서 봉양서숙 구지(舊址)에다 건립한 정자다. 하락정의 모태가 된 두 강학 공간은 6·25 동란 와중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구한말의 학자요 계몽운동가이며 독립지사였던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공의 정자다. 이 정자는 선생께서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大義)를 실현하기 위해 강학 공간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던 유서 깊은 장소다. 선생은 국권 회복도 먼저 알아야 함을 통감하고 가산을 기울여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하락정의 현 소유자는 해창 선생의 종손(從孫) 송시익(宋時益)씨다. 이러한 큰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해창의 계씨인 봉산(鳳山) 송연식(宋淵植)공의 역할이 컸다. 해창이 서산 김흥락의 문도인데 비해 봉산은 척암 김도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송기식(宋基植 : 1878,고종15∼1949)
진천인(鎭川人). 자는 공필(鞏弼) 호는 해창(海窓). 송정공파(松亭公派) 파조인 우(愚)의 17대손이요 괴당(槐堂) 순호(淳昊)의 맏아들이다. 1898년(21세)에 서산 김흥락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니 선생은 공이 묘령인데도 총명(聰明) 아정(雅正)함을 특히 사랑하였다. 후에 스승의 문집인 『서산선생문집』간역에 7년간 주역을 맡아 31권 16책으로 간행했다. 공은 국운이 기울자 동산 류인식 선생과 함께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던 중 일경의 무수한 탄압을 받았으나 조금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은 안 동 송천에다 가산을 기울여 봉양서숙(鳳陽書塾)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했는데 석주 이상룡 선생이 왕림하여 격려하기도 했다. 그 뒤 만년에는 계씨에게 봉양서숙을 맡기고 서울 녹동서원, 단양향교에서 강학을 하엿고, 만년에는 다시 남선면 신석리에 인곡서당(麟谷書堂)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향년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12월 13일에 독립유공으로 대통령포상이 추서되었다. 문집 5책이 남아있다.

♧답사노트
해창이란 호는, 문집 서문을 쓴 평산인 신언직(申彦稷)은 '시우주위일와(時宇宙爲一窩) 사해위일창(四海爲一窓)'이란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해창의 개화적인 세계관을 잘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정자 명칭인 하락정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명명한 것으로, 지명인 임하(臨河)와 낙동강(洛東江)과도 관련지을 수 있겠으나 도학(道學)에도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던 공의 생애를 생각한다면 하도낙서(河圖洛書)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된다.
정자 뒤 산 위에는 진천 송씨 안동 입향조인 교하공 선충(善忠)공의 묘소가 있다. 정자 앞 송림 속에는 공의 고조부인 덕영(德榮)공의 묘소인데 효자에 정려된 재기(在璣)공의 증손자이다.

『안동의 문화유산(1997년 12월 안동문화원 발행)』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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