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집 제19권 / 훈련원 도정 송립(宋岦, 1582~1667)의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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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9권 / 훈련원 도정 송립(宋岦, 1582~1667)의 묘갈명

송창환 0 2153
정헌대부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송공의 묘갈명 서문을 아우르다〔正憲大夫訓鍊院都正兼五衛都總府都總管宋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입(岦)이며, 자는 입지(立之)이고, 성은 송씨(宋氏)로 본관이 진천(鎭川)이다. 고조 휘 연종(連宗)이 성종(成宗) 8년(1477)에 을과에 급제하여 병조랑(兵曹郞)이 되었다. 증조 휘 장(藏)은 고창(高敞) 현감을 지냈는데 통정대부 호조 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수옥(粹沃)은 가선대부 호조 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휘 백순(伯純)은 자헌대부 호조 판서(資憲大夫戶曹判書)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해졌기 때문에 추은(推恩)된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기특한 기상이 있었다. 평수길이 난을 일으키자 판서공은 검지산(黔芝山)에 들어가 왜노를 쳤는데 용감하게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 때 공의 나이 11살로 그 형 주부군(主簿君)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방속에 갇혔는데, 벽 사이에 날카로운 송곳이 있는 것을 보고 밤중에 손으로 날카로운 송곳을 뽑아내어 벽에 구멍을 파고 나와서 마침내 탈출하여 검지산으로 가서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수의를 마련해서 장사 지냈으니, 향리에서 그 효성을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장하여서는 날래고 용감하기가 타인을 능가하였다. 광해군 8년(1616)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예부터 있어온 일로서 처음 선전관에 제수되면 면신례(免新禮)가 있었는데, 묶어서 욕을 보이며 몽둥이로 쳐서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공이 치욕스러워하여 그 자리에서 관모(官帽)를 벗고 마침내 벼슬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선전관이 되었는데 낭료(郎僚)들이 공이 굽히지 않을 것을 알고 곧바로 면신(免新)을 허락하였다.
이듬해 공이 사신을 따라 연경(燕京)에 조회를 갔는데 그 수고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하였다. 얼마 있다가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고 고령진 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로 나갔다가 덕원 도호부사(德源都護府使)로 개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역신 이괄(李适)이 평안도 절도사를 하였는데 공이 용감하다고 하여 함께 하기를 청하니 인조가 허락하였다. 이듬해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기회를 살펴 이괄을 참수하려고 하여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괄의 좌우에 장사가 많이 있는 것을 보고 범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만약 성사되지 못한다면 장부의 7척 몸이 단지 가루가 될 뿐이니 충국(忠國)의 마음을 무슨 방법으로 스스로 밝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즉시 은밀히 개천 군수(价川郡守) 허전(許佺)과 원수(元帥)의 진영으로 가기로 약속하고, 토산현(兎山縣) 가삽교(加鍤橋)에 이르러 휘하의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원수의 군영에 나아가 통곡을 하니 원수가 감동하여 이에 맞아들여서 만나보았다. 안현(鞍峴)에 이르러 공이 선봉에 서서 이괄의 머리를 베는 데 참여하여 원종 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숭정 6년(1633)에 가선대부 회령 도호부사(嘉善大夫會寧都護府使)에 발탁되었다. 2년 후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또 죽산 도호부사(竹山都護府使)로 나갔다. 앞서, 광해군의 후궁 김씨에게 아끼는 아우가 있었는데 광해군이 가장 길한 사람을 얻어 그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여 술사로 하여금 문무 제신(諸臣)의 운명을 추리하게 하니 술사가 공의 명이 가장 길하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공에게 시집가도록 명하니, 공이 무신으로서 감히 사양하지는 못하였으나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광해가 권세를 누리게 해주려고 김씨를 시켜 은밀히 공에게 알리니 공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광해군의 시대가 끝날 때가지 관직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광해가 폐출되자 공을 위리별장(圍籬別將)으로 삼으니 공이 상소하기를, “신과 광해는 동서의 관계가 있으니 감히 의심을 무릅쓰고 별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인조가 하교하기를, “송립은 충의로운 선비인데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겠는가.” 하며 속히 영을 내려 가도록 하니, 공이 이에 길을 떠났다. 일찍이 광해를 신하로서 모셨기 때문에 그를 대우함이 관대하고 예가 있었으니 사대부들이 공의 마음에 감복하였고 광해도 그 의리에 감동하였다.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공이 성을 지킨 수고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總府副總管)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재령 군수(載寧郡守)로 나가 장수산(長壽山)에 성을 쌓았는데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성 쌓는 일을 함께 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성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들어와서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이 되었으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승진하였다가 부령 도호부사로 나갔다. 효종 원년(1650)에 또 용천 도호부사(龍川都護府使)로 나갔다. 10년 후에 대질(大耋)이라 하여 자헌대부 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에 올랐다.
현종 3년(1662)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무재(武才)를 검열하였다. 공이 그 때 나이 81세였는데 시위(侍衛)로서 말 타고 활쏘기를 시험하기를 청하니 상이 장하게 여겨 허락하고 사복시(司僕寺)에게 명하여 노마(路馬)를 내어 공에게 주어 타도록 하였다. 공이 명을 받아 단번에 뛰어 말에 올라 달리며 화살을 연달아 5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중하니 우림(羽林)의 장수들이 기뻐 뛰지 않음이 없었다. 상도 기뻐하여 그를 위해 얼굴빛을 고치고 하교하기를, “송립이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활을 잡고 말을 달려 나는 듯이 화살을 쏘니 노쇠한 기색이 없구나. 그 노익장이 마원(馬援)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總府都總管)을 가자하였다.
6년 후 정미년(1667) 3월 6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가 86년이었다. 부고를 듣고 현종(顯宗)께서 탄식하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그 해 윤4월 4일에 금천(衿川) 갈언(葛堰)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과감하였으며 큰 절개가 있었다. 관리로 있을 때 청렴결백하여 덕원(德源)ㆍ회령(會寧)ㆍ죽산(竹山)ㆍ재령(載寧)ㆍ부령(富寧)ㆍ용천(龍川) 여섯 고을의 태수를 하였으나 전원을 넓혀 자손의 생업을 위한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으니, 늙어죽을 때까지도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보위를 이어받았을 때 후궁의 인아(姻婭)로서 은혜를 받아 마땅히 병마절도사가 될 수 있었으나, 능히 스스로 지조를 지켜 끝내 광해에게 등용되지 않았다.
서쪽 군영에 있을 때 이괄이 은밀히 신임하는 무사들과 밤낮으로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공을 몹시 꺼리어서 어떤 일로써 자산(慈山)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공이 떠나고 나자 이괄이 과연 반란을 일으켰다. 자산 부사 안몽윤(安夢尹)이 그를 위협하여 죽이려고 하자 공이 한밤중에 성벽에 밧줄을 매달아 도망가서 즉시 스스로 맹세하기를, “내가 서울로 가면 나라를 위한 마음을 밝힐 수가 없다.” 하고 이에 이괄의 군중으로 돌아가서 날카로운 칼을 쥐고 그를 찌르려고 하였으니, 이는 그 의지가 장하다고 할 만하다. 공의 부인은 모주 모씨로서 모관 모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질었으나 일찍 죽었다. 서자가 몇 명 있으니 모(某), 모(某)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이 때 사로잡혔으나 / 童而俘兮
능히 밤중에 뛰어넘어 / 能夜驀也
깊숙한 진영을 탈출하여 / 脫深壘兮
아버지 유골을 거두었네 / 收父骼也
날카로운 칼을 품고 / 懷白刃兮
엄중한 군막에 들어갔으나 / 入重帟也
호랑이에게 조아(爪牙)가 있어 / 虎有爪兮
찌를 수가 없었다 / 刺不獲也
우리 원수를 따라 / 從我元帥
목을 베어 바치기로 맹세하고 / 矢獻馘也
이 큰 국란을 다스렸으니 / 靖此大難
공이 혁혁히 빛나도다 / 功赫赫也
백발에도 말을 타고 / 黃髮乘馬
활을 쏘아 적중시켰으니 / 射中的也
과감하고 용맹스러워 / 維敢維勇
무덤 앞에 새기노라 / 銘幽穸也

公諱,字立之,姓宋氏鎭川人也。高祖諱連宗成廟八年,擧乙科爲兵曹郞。曾祖諱高敞縣監,贈通政大夫、戶曹參議;祖諱粹沃,贈嘉善大夫、戶曹參判;考諱伯純,贈資憲大夫、戶曹判書,皆以公貴推恩也。
公幼卓犖有奇氣。平秀吉亂,判書公黔芝山,擊奴敢力戰,弗克死之。公年十一,與其兄主簿君,皆爲所俘,幽之室中。公見壁間有利錐,夜半手自拔利錐,穴壁而出,遂脫身,歸黔芝山,得父屍,具衣以葬,鄕里莫不稱其孝。
及旣長,驍勇絶人。擧光海八年武科,授宣傳官。故事,初拜宣傳官,有免新禮,縛辱椎扑,不堪其苦。公耻之,立脫其帽,遂不仕。明年,復爲宣傳官,諸僚知公不可屈,直許免新。又明年,公從使臣朝京師,以勞加折衝將軍。已而拜五衛將,出爲高嶺鎭僉節制使,改德源都護府使。
仁廟靖社,逆臣平安道節度使,以公勇敢,請與偕,仁廟許之。明年反,公欲伺機斬首,乃懷白刃,入帳中,見左右多壯士,知不可犯。乃太息曰:“事若不成,則丈夫七尺之身,徒爲虀粉,忠國之心,何以自白乎?” 卽陰與价川郡守許佺,約投元帥營,至兎山縣加鍤橋,率所部兵三千人,詣元帥軍,哭之慟。元帥感動,乃延見。及至鞍峴,公先登,與斬首,冊原從一等功臣。
崇禎六年,擢嘉善大夫、會寧都護府使。居二年,入爲同知中樞府事,又出爲竹山都護府使。初,光海後宮金氏有愛弟,光海欲得最吉人以歸之,令術者推文武諸臣之命,術者言公命最吉。於是光海命歸公,公以武臣,不敢辭而非其好也。光海意欲柄用之,乃使金氏密諭於公,公不肯。由是,終光海之世而官不顯。
光海廢,以公爲圍籬別將。公上疏言:“臣與光海,有僚婿之義,不敢冒疑而爲別將。” 仁廟下敎曰:“宋岦忠義之士,豈可以小嫌疑之?” 速令往赴,公乃行。以嘗臣事光海,故待之寬而有禮,士大夫服公之心,而光海亦感其義。
南漢,公守城勞,陞嘉義,授五衛都總府副總管。明年,出守載寧郡,城長壽山,率僧徒,與共版築,不勞民而城遂成。入爲訓鍊院都正,進漢城府右尹,出爲富寧都護府使。孝廟元年,又出爲龍川都護府使。後十年,以大耋,陞資憲大夫、知中樞府事。
顯廟三年,上御春塘臺,閱武才。公時年八十有一,以侍衛乞試騎射,上壯而許之,命司僕寺出路馬,予公乘之。公拜命,一躍上馬,馳射之連發五矢,皆中之,羽林諸將,無不懽聳。上亦喜,爲之改容,下敎曰:“宋岦年踰八十,能引弓馳射如飛,未嘗有衰老之氣,其矍鑠不愧馬援。” 特命加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總府都總管。後六年丁未三月初六日,卒于家,享年八十六。訃聞,顯廟嗟悼之,遣官致祭。以其年閏四月初四日,葬于衿川葛堰之原。
公爲人剛毅果敢,有大節。居官廉潔,爲德源會寧竹山載寧富寧龍川六太守,而未嘗廣置田園,爲子孫業,至老死,不改其操。方光海嗣位之時,以後宮姻婭之恩,當得兵馬節度使,而能自守,終不肯爲光海用。
及在西幕,陰與腹心之士,日夜謀反,而忌公甚,乃以事送留慈山。公旣行,而果反。慈山府使安夢尹欲逼殺之,公夜半縋城亡去,卽自誓曰:“我歸京師,無以明爲國之心。” 乃還走賊軍中,提白刃而欲刺之,此其志可謂壯矣。公夫人某州某氏,某官某之女,生一子,賢而早死。庶子幾人:曰某,曰某。銘曰:

童而俘兮,能夜驀也。脫深壘兮,收父骼也。
懷白刃兮,入重帟也。虎有爪兮,刺不獲也。
從我元帥,矢獻馘也。靖此大難,功赫赫也。
黃髮乘馬,射中的也。維敢維勇,銘幽穸也。



[주-D001] 정헌대부 …… 송공 : 
송립(宋岦, 1582~1667)이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입지(立之)이다. 이괄의 휘하에 있다가 이괄의 난 때 관군에 투항하여 이괄의 군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성 군수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죽산 부사로서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여 굳게 지켰고 그 공으로 재령 군수가 되었으며, 그 뒤 한성 부윤이 되었다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정(壯靖)이다.
[주-D002] 추은(推恩) : 
할아버지나 아버지, 또는 자손의 공로로 관작(官爵)을 제수받거나 더 높여주는 일을 말한다.
[주-D003] 검지산(黔芝山) :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산이다. 검은 색의 영지가 많이 났다고 한다.
[주-D004] 선전관(宣傳官) : 
조선 시대 선전관청에 속하여 형명(形名)ㆍ계라(啓螺)ㆍ시위(侍衛)ㆍ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무관직으로 정3품부터 종9품까지 있었다. 선전관은 근시(近侍)의 일을 했기 때문에 서반승지(西班承旨)로 지목되어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또 장차 무반의 중추가 될 인재라는 점에서, 무재(武才)가 있고 용맹스러운 사람을 뽑아 임명했으며 끊임없이 무예와 병법을 연마시켰다.
[주-D005] 이괄(李适) : 
1587~1624.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이다. 1622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반정을 성공시켰다. 1624년 아들 이전(李旃)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아 영변의 군영에 금부도사가 당도하자 분노하여 난을 일으켰다. 탁월한 작전으로 서울로 진격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하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한 뒤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지 이틀 뒤 관군에 참패하여 이천(利川)으로 도망했는데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 등에게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
[주-D006] 원수(元帥) : 
도원수 장만(張晩, 1566~1629)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며 증 이조 판서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이다. 함경도 관찰사 때에는 누르하치의 침입을 경고해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했고, 1610년(광해군2) 동지중추부사로 호지(胡地)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쳤다. 인조반정 후 도원수에 임명되어 원수부를 평양에 두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이를 진압하였다. 이 전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주-D007] 토산현(兎山縣) : 
황해도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係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주-D008] 안현(鞍峴) : 
길마재, 즉 서울의 무악재를 말한다. 서울 북쪽의 좁고 높은 고개로서 군사적 요지였다.
[주-D009] 원종 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 : 
원종공신은 조선 시대의 훈봉공신(勳封功臣)으로서,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 외에 왕을 수종(隨從)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이다. 대부분이 정공신의 자제 및 사위 또는 그 수종자들에게 녹훈되었다.
[주-D010] 위리별장(圍籬別將) : 
죄인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을 지키는 무관직이다.
[주-D011] 대질(大耋) : 
80세를 말한다. 옛날에 선왕(先王)들은 나이 많은 이를 높여 대질에 이르면 작위를 내려 주었다.
[주-D012] 춘당대(春塘臺) : 
창덕궁 영화당(映花堂) 앞의 넓은 마당으로 국가의 공식, 비공식 행사를 치르는 장소로 쓰였다. 과거시험, 무예 검열, 임금의 활쏘기 연습 등을 하였다.
[주-D013] 노마(路馬) : 
노(路)는 임금의 수레를 말하며, 노마는 임금의 수레를 끄는 말이다.
[주-D014] 우림(羽林) : 
우림위(羽林衛)로, 궁궐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담당한 금군(禁軍)이다.
[주-D015] 마원(馬援) : 
기원전 14~49. 왕망(王莽)이 전한(前漢, 기원전 206~25)을 멸망시킨 후 후한(25~220)의 건국을 도운 장군이다. 처음에는 왕망의 신(新)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나 결국에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의 신하가 되었다. 35년 화남(華南) 지방의 태수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지금의 북베트남에 이르는 지역까지 중국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했다. 45년에는 북방 국경지대로 파견되어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을 제압하는 데 힘썼다. 마원은 죽은 다음 신(神)으로 받들어졌다.
[주-D016] 금천(衿川) : 
서울시 금천구 지역의 옛 지명이다.
[주-D017] 안몽윤(安夢尹) : 
1571~1650.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상경(商卿)이며, 아버지는 직장(直長) 안세복(安世復)이다. 음보로 군직에 나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토벌하였고, 이적행위를 하던 왜역관 김덕회(金德澮)ㆍ김응관(金應灌)을 목 베어 행재소에 보냈다. 전주 분조(分朝)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전부우협장(前部右協將)으로 군량 보급에 힘쓰고 서울의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진무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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