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아들과 함께 전사한 희거공 諱 원 조부의 생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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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아들과 함께 전사한 희거공 諱 원 조부의 생졸년

송은도 0 3631
 
희거공 諱 원 조부는 낭장공 후손 이다. 
字는 希蘧(희거) 이며, 諱는 瑗 (원) 이다.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위에 급제 하시었다. 희거공은 여절교위를 거쳐 군수를 지냈으며, 우리 족보는 생년은 기록하지 않고 무술년에 卒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좌랑공 諱 주빈이며, 우리 족보에 좌랑공은 임진왜란 당시에 용산창고를 사수하던 중, 왜군에게 생포되었고, 아들 희생과 함께 왜군의 칼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1789년 여진공 諱 주세 조부가 쓰신 기유보, 1799년 사적공 諱 계손 조부가 쓰신 기미보에 기록하고 있다.
 
우리 족보는 公의 출생 년도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국조방목에 중종 27년 (임진 1532년) 출생한 것이 확인된다. 
국조방목에 좌랑공 諱 주빈 조부는 辛亥로 하였는데, 우리 족보에도 신해 출생으로 되어 있다.

한편, 문과방목에 희거공과 좌랑공은 '壬辰倭亂 被害'라고 하였으니, 희거공은 중종 27년 (임진1532년)에 출생하여 선조 25년 (임진 1592년)에 졸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족보는 희거공 諱 원 조부의 卒년을 무술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진천송씨 최고 족보인 1673년 계축보에는 희거공이 임진왜란 중에 해를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좌랑공 諱 주빈 또한 임진왜란 중에 해를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계축보에는 좌랑공의 장남 희생은 언급조차 하지않고, 외아들 海 (해)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다. 
아마도, 계축보가 옳게 기록하였으나, 이후에 어떤 혼동으로 인하여 희거공의 졸년을 잘 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위 내용은 계축보 이며, 좌측 아래 두번째가 희거공 諱 원 조부이다.
명종 19년 (갑자년 8월) 식년과에 급제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 밑줄에 아들 좌랑공 諱 주빈 조부가 보인다.
 

 
 
다음 장을 보면, 오른 쪽 맨 윗줄 첫칸에 '壬辰倭亂 遇 害'라고 쓰여있다.
임진왜란 때 해를 당하다. 뜻으로 보인다.
 
 

 
계축보를 보면 좌랑공 諱 조부도 壬辰倭亂 遇 害 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계축보에는 장남 희생은 없고, 외아들 海 (해)만 보인다.
 
 

 
여진공 諱 주세 조부가 쓰신 1789년 기유보 이다.
이곳에 보면 희거공이 명종 갑자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만력 무술년 12월 28일 卒 한 것으로 쓰여있다.
그리고, 좌랑공 諱 주세 조부는 장남 희생과 함께 임진왜란 중에 왜적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어있다.

 

 
 

 
사적공 諱 계손 조부가 쓰신 1799년 기미보이다.
희거공 諱 원 조부가 무술년 12월 28일 卒 하였다고 쓰여있다.
 
 
 

기미보 또한 기유보 처럼 좌랑공 諱 주빈 조부가 임진왜란 때에 장남 희생과 함께 왜적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하고 있다. 계축보와 다른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느 족보가 정확한 것인지 궁굼하지 않을 수 없는데,
희거공과 좌랑공은 모두 대과에 급제한 분들로 조선문과 방목에 존함이 기록되어 있고, 그곳을 확인하여 보면, 두분 모두 壬辰倭亂 被害라고 쓰여있다.

 
 

즉, 희거공 諱 원 조부는 계축보가 전하는 내용처럼 임진년에 왜란으로 아들 좌랑공 諱 주빈 조부와 함께 전사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계축보에 보이질 않고, 기유보 이후 족보에 보이는 좌랑공의 장남 희생은 정말 임진왜란 당시에 용산창고에서 자신의 부친 좌랑공이 왜군의 칼에 당할 때에 함깨 희생을 당한 것인지... 의심이 될수 밖에 없다.
 
 
http://cafe.naver.com/jinsongs/504
족보 및 문과방목의 복사 내용은 링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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