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락정에서 시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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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락정에서 시향을

송병혁 0 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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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입향(安東 入鄕) 400년에 처음으로 우리는 금년에 시제(時祭)를 재사봉향(齋舍奉享)으로 올렸다. 2012년인 작년까지도 이십여 제관(祭官)이 송천(松川)의 교하공(交河公 善忠) 산소를 필두로 올리고는 자동차로 잡실[自邑谷], 석시리[石甑洞], 석낭골[石南洞]을 돌아가면서 제사를 올렸다. 아침부터 온종일을 높은 산도 오르내리면서 순례(巡禮)의 제사를 다녀야했다. 석시리의 호군공(護軍公 善一) 묘전(墓前)에서 음복(飮福)을 하고나면 해가 다 기울고, 시내로 나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어두워서야 헤어지곤 했었다.

  세 번에 걸쳐 제례(祭禮)를 하고서도 따뜻하게 군불을 지펴 양쪽 방으로 나누어 앉아 음복을 하면서 정답게 종친의 우의(友誼)를 나누고도 넉넉한 한낮이니 얼마나 시간의 여유가 있는가. 싸갈 것도 없이 연신 날라 오는 철상(撤床)한 음복을 떡이며 고기며 과일을 나누어 먹으면서 약주를 권하여 친교를 하는 분위기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근 십여 차례나 이곳저곳을 찾아서 지내던 제사를 한 자리에서 세 번에 다하니 여간 편리하지가 않다. 1년에 한 번이라도 선영(先塋)에 찾아가 시제를 올림이 참으로 좋겠으나 생활 패턴(pattern)이 크게 달라진 현대사회에서는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다. 제관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대개 노년(老年)층이 참여하다보니 점점 고령화(高齡化) 되어가고, 젊은이는 참여가 늘지 않는다. 이로서 협의 끝에 금년부터는 선대(先代)7()의 고, 비위(考妣位)의 제사 단비(壇碑)를 교하공(交河公) 산소 옆에다 세우고 재실에서 제사를 올리기로 종중의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송천의 소위 귀당(龜塘)에 여러 해를 방치(放置)되어온 퇴락한 하락정(河洛亭)을 금년에 크게 중수(重修)를 하게 된 것도 마침 다행한 일이다. 전에는 바삐 서둘러 올린 제사라서 홀기(笏記)를 매번 읽어 격식을 차릴 처지도 못 되었었다. 하나 금년부터는 이를 준비하여 보다 더 격식을 갖추게 되니 의미가 한결 새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좀 촉박하게 내가 부탁을 받았으나 애써 홀기를 한문(漢文)과 번역문까지 준비하여 가지고 갔다. 교하공 제례에는 한문과 국문을 병행해 진행하였고, 다음 두 번의 3()7() 제사에는 우리말로만 홀기를 실행했다.

  서울에서는 교하공종중회장 병오(炳午) 족형(族兄)과 둘이서 아침 일찍 고속도로 정체를 피하려고 아침 6시에 신이문역에서 자동차로 출발했더니 진천송씨 안동 숭조원(崇祖園)에는 10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새로 큼직이 높여 세운 숭조원 비석이 확연히 환영해 준다.

  총무 무길(武吉) 형이 혼자 와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루는 먼지가 쌓였고, 방안은 냉랭하여 서울에서 영하로 살짝 내려간 찬 날씨는 안동도 별반 나을 바가 못 되었다. 제사만 지내고 점심은 식당으로 갈 요량으로 방에 불을 때지 않았다는데, 양복을 입고 왔지만 라이터를 빌려서 군불을 서둘러 내가 때기 시작했다. 공사하느라 걷어놓은 나무토막들이며 나뭇가지들을 주워다 불을 지폈다. 바람이 좀 불어서 연기와 그을음을 마시기도 했지만 양쪽 방을 덥히려고 툇마루 밑의 작은 부엌에다 부지런히 불을 지폈다. 좌윤공(左尹公 瑞麟/ 1767-1830)의 주손(冑孫)인 진걸(鎭杰) 군이 오더니 기꺼이 나서서 내 하던 일을 대신 맡아서 불을 때는 게 아닌가.

  여럿이 모이자 마루도 쓸고 닦으며, 새로 구입한 제기(祭器)를 가지런히 하고 진설을 함께 하였다. 찬인(贊人)도 세우고, 좌우집사(左右執事), 헌관과 축관을 분정(粉定)하니 짧은 시간에 준비도 곧잘 완료된다. 헌관 등의 분담을 사전에 정하여 충분한 준비와 예전처럼 하루 전의 재계(齋戒)는 못했지만 삼가 경건하게 준비된 자세로 임하기를 기대해 본다.

  하락정은 본래 학교나 서당(書堂) 같은 부속 정자(亭子)로 해창(海窓 基植/ 1878-1949)이 처음 세웠고 뒤에 개축되었다. 한 때 우리 종중에서 여기에 모임을 열기도 했는데 대지의 소유권과 수리 문제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걸 금년에 종중에서 모금을 하고 안동시의 문화재 기금을 조금 지원 받아 새롭게 단장했던 것이다. 땅도 일부는 기증을 받고 일부는 종중에서 매입을 해서 소유권도 교하공종중의 명의로 거의 2백여 평이 새로 등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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