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중과 문하시중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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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중과 문하시중평장사

송은도 0 6374
 
 
진천송씨 종보 2013년 추계 제78호가 발간 되었습니다.
이번 종보에도 우리 집안과 관련하여 많은 글이 수록되어 있고, 종보편집위원의 노고가 보여,
종보를 받아보는 종인의 입장으로 대종회 실무진 및 종보편집위원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종보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글이,
종보 9-12쪽에 수록된 <진천백과 평장사> 편이다.

 
종보에 존함이 없이, '편집실'이라 쓰여져 있어, 작성자는 어느 분인지 알수 없으나,
많은 연구를 하고, 심혈을 기울려 쓰신 것으로 보인다.

그 글의 논점을 보면 평장사와 문하시중 평장사 중 어느 것이 올바른 표현인가에 대한 논평으로 보인다.
이는 종보에 실려 알고 있겠지만, 우리 집안 족보에는 진천백 시조부의 관직에 대하여 평장사로 기록되기도 하고, 문하시중 평장사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먼저, 족보를 보면 아래와 같다.
1673년 계축보 (송정공) - 고려평장사
1677년 기유보 (평리공) - 찬화의덕 윤리공신 삼중대광 문하평장사
1799년 기미보 (송정공) - 고려평장사
1838년 무술보 (평리공) - 찬화의덕 윤리공신 삼중대광 문하평장사
1859년 후기미보 (송정공) - 고려평장사
1867년 정묘보 (평리공) - 찬화의덕 윤리공신 삼중대광 문하평장사
1905년 을사보 (송정공) - 고려평장사
1915년 을묘보 (평리공) - 평장사 윤리공신
1924년 갑자보 (교하공) - 고려평장사
1957년 정유보 (평리공) - 고려문하시중평장사
1966년 병오보 (송정공) - 고려평장사
1975년 을묘보 (대동보) - 고려평장사
1987년 정묘보 (대동보) - 찬화의덕 윤리공신 은자광록대부 삼중대광 고려평장사
2007년 정해보 (대동보) - 고려문하시중평장사

 
동일한 시조부의 관직인데도, 어느 곳은 고려 평장사라고 했고, 어느 곳은 찬화의덕 윤리공신 삼중대광 문하평장사라고 하였다.
 

대체로 보면 송정공 집안에서 만든 족보는 고려평장사로 기록하고,
평리공 집안에서 만든 족보는 찬화의덕 윤리공신 삼중대광 문하평장사, 고려평장사라고 한것을 알수 있다.

 
한편, 근래 족보인 1957년 정유보에 고려문하시중평장사로 하였는데, 이번 2007년 정해보 또한 고려문하시중평장사로 한 것을 알수 있다.

여기에서 잠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집안은 족보를 만들 때 마다, 어느 집안이 주도했느냐에 따라 시조부님의 관직명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예전에 별보 집안 기록에 있어서도 다툼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본론으로,,,
이번 종보에 문하시중과 문하시중평장사 중 어느 표현이 맞는가라는 논쟁이 기재되어 있다.
그곳에는 문하시중이란 종1품이며 정원은 1인이고, 오늘 날 수상에 해당하며,
문하시중 평장사는 '두'개의 관직이 합성된 것으로 오늘 날 표현을 하자면 총리 장관이라는 뜻이되어, 문하시중으로 하던지, 아니면 평장사로만 해야한며,
이는 단국대학 교수를 역임하신 안성공파 00박사님의 견해임을 밝혔다.

 
한편, 이에 반대 의견으로 전서공파 00 고문의 견해로 다른 집안의 족보에도 문하시중평장사라고 되어 있으니, 문하시중평장사가 올바르다는 견해도 밝히고 있다.

 
다만, 종보편집실의 주장을 보면, 문하시중으로 하던지 아니면 평장사로만 해야한다는 의견으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문하시중평장사라는 말이 '두'개의 관명을 합친 개념일까?
결론은 맞는 말이다. 사학과 박사 출신 교수님의 견해이니, 그 분이 오직 알아서, 이런 주장을 하셨을까?
 
고려사를 보면 문하시중평장사라는 관직은 사실없다.

종보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잠시 고려의 관제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당의 3성6부제를 도입하여
문하성 (왕명하달과 신하의 건의수용),
내사성 (조칙에 관한 업무처리 - 훗날 문종 때 중서성으로 개칭),
상서성 (6부 집무수행) 이라 하여, 문하성의 장관은 시중, 중서성의 장관은 중서령, 상서성의 장관은 상서령이며, 상서성 아래에는 이, 호, 예, 병, 형, 공 6부가 있었다.

 
한편, 문하성의 시중을 문하시중이라고 하는데, 중서령 이나 상서령과 함께 종1품으로 재신이라 하였으며, 중서령이나 상서령은 종친이나 원로에게 주는 영예직 이나 증직인 반면, 시중 (문하시중)은 고려최고의 관직 이었다.

여기에서 고려사를 살펴보면,
문하성과 내사성 (중서성)의 기능이 비슷하여, 이를 통칭하여 내사문하성 이라고 하였는데,
훗날 문종시절 내사성을 중서성으로 개명하며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이라 불렀고, 역시 장관의 명칭도 문하시중에서 문하시랑으로 바꾼 것을 볼수 있다.

또한, 문하시중은 종1품의 관직인데,
그 아래 종2품 문하시랑평장사와 중서시랑평장사 (내사시랑평장사)가 정원 각1명씩이 있다.
 
이것은 중서문하성의 장관이 문하시중이고, 그 아래 차관으로 문하시랑평장사 (문하성 차관)과 중서시랑평장사 (중서성 차관)가 각 1명씩 구성된 것이다.

우리 족보에 진천백 조부의 손자로 평장사공 諱 순 조부가 계신데, 고려사를 보면 위 분이 고려 종2품 문하시랑평장사와 중서시랑평장사를 모두 지내셨으며, 우리 족보에도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다고 밝히고 있다. 즉 평장사공 諱 순 조부께서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을 지낸 분이다.

 
여기에서 오늘 날 여러 집안이 그 족보에 문하시중평장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고려사에 문하시랑평장사나 중서시랑평장사라는 벼슬이 보이니, '문하시중'에도 평장사를 곁들여 쓸수 있다고 혼돈하여 잘못 기재한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덧 붙여 설명하자면,
우리 집안 진천백 시조께서 과연 종1품 문하시중 벼슬이나, 종2품 평장사 벼슬을 지내셨을까?
 
이미 종보에도 밝혀져 있지만 사실 이 부분은 확실하지가 않다.

이유는 충북 진천시 덕산면에 모셔진 진천백 조부님의 묘소에는 말총 (말 무덤)이 있는데, 위 말총은 진천백 조부께서 장군으로 생전에 타고 다니던 말을 순장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고려사 인종 기록에 보면, 장군 송인 이라는 분이 보이는데, 위 분이 인종시절 이자겸의 난 때에 임금을 호위하다, 척준경 잔당에 의해 체포되어 순국하신 것으로 짧은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알수 있는 것이 우리 진천백 조부님은 사실 무신 (장군) 출신 이었다.
그런데, 문하시중이나 평장사 벼슬은 문관의 벼슬로,
진천백 조부님 시절은 문관우대 무인천대의 관례로 인하여, 무인출신은 절대 문관의 벼슬에 오를 수 없으며, 무인 출신은 무관이라 부르지도 않고, 문관보다 한수 아래로 보아 무신이라 부르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무신의 최고 관직은 상장군인데, 그 품계가 종3품으로 문관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대우를 받던 시절이다.

 
여기에서 고려사를 참고하면, 무신도 문관들이 독점했던 벼슬을 오르게 되는데, 그 1호가 척준경이다. 그는 장군으로 이자겸의 사돈인데, 그가 이자겸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가, 훗날 이자겸을 주살한 공로로, 종2품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그리고, 고려 의종 때 무신들이 문관들에 천대받는 것에 불만으로 <무신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부터 무인들도 문관들이 독점했던 벼슬에 편승하며 종2품 평장사 벼슬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진천 백 조부께서 문하시중 벼슬이나 평장사 벼슬에 올랐다는 것은 사실 맞지않는 가설에 불과하다.
또한 종보에도 밝혔지만, 고려사에 보면 진천 백 조부께서 전사한 기록만 있지, 문하시중 벼슬이나 평장사 벼슬을 제수 받거나 사후 증직되었다는 내용은 전무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으나, 대부분 집안의 족보가 자기 조상의 내력을 포장하여 우리는 훌륭한 분의 후손이라고 기술한 사례들이 많은데, 우리 집안 족보도 그런 면이 없지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족보이다면, 겉보기가 화려한 포장 보다는 사실대로 기술하는 것이 올지않나 생각된다.

 
얼마전, 어느 문중에서 묘역을 새로 정비하며, 비문을 새로 새기고, 그것을 사진촬영하여 카페에 올린 것을 보았는데, 그 비문에는 진천 백 조부께서 고려 인종시절 이자겸 난에 대항하여 임금을 호위하다 전사하신 장군 이다며 사실대로 기록한 내용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비문에는 문하시중 벼슬도, 평장사 벼슬도 없이 오직 있는 그대로 고려시대 '장군' 이라고 솔찍히 표현해 놓았다.

 
우리 족보도 언제가는 사실대로 기록해야 올바르지 않을까 생각하며,
끝으로, 문하시중평장사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문하시중 이라고 쓰거나, 평장사로 써야 올바른 표현이지만,
앞으로 진천 백 조부님의 관직은 고려 <장군>으로 해야 올바른 것 임을 재강조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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