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를 잊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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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를 잊지 않아

송병혁 0 3183

                 bdcac3bbc7e5.jpg (진천송씨 묘소 앞에서 진송 참례자들)

   남의 열 아들 부럽지 않다.  잘 키운 딸 하나 남의 열 아들들보다 낫다는 속담이었다. 실로 우리 진송(鎭宋)의 정선공(旌善公 )은 조선 초기 때 딸 둘만 양육했는데 둘째를 양주(楊州) 샘내에서 지금의 용인(龍仁) 쪽 경주김씨(慶州金氏)네로 출가시켰다.

   이번 109일 용인 죽전(竹田)에서 십청헌 김세필(金世弼) 선생 54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이 사실을 체득하게 되었다. 십청헌의 외가인 진천송씨 대종회로 초청장을 보내와서 우리가 6명이 참례하면서 새로운 정의(情誼)를 다지게 되고 이런 좋은 경험을 나누고 돌아왔다.

   재물출납과 의복을 관장하던 상의원(尙衣院)에 종4품의 첨정(僉正)을 지낸 사위 김훈(金薰)과의 사이에서 정선공의 따님 진천송씨는 22녀를 잘 키우고 손자녀들도 다 훌륭하게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 하늘의 별들처럼 우리나라 각처에서 번연하고 빛이 나고 있다.

   정황을 참작하건대 이 진천송씨 할머니는 친정에 대한 긍지감으로 받은바 교육에 바탕에서 자녀를 교육했음에 틀림없으니 둘째아드님 십청헌(十淸軒 金世弼/ 1473-1533)이 외가인 진천송씨 족보를 맨 먼저 편집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할머니의 손자, 십청헌의 셋째아드님 충민공(忠愍公 金䃴/ 1509-1547)이 선고(先考)의 생존시 충주에서 지으신 진천송씨 족보를 진천송씨 서교공(西郊公 贊/ 1510-1601)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신축보(辛丑譜 1541)가 창보(創譜)된 것이다.

  이 하나 만으로도 정선공은 외손자로 인하여 우리 송문(宋門)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으니 열 아들 아니 부럽다고 함은 당연하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가를 잊지 않도록 잘 가르친 어머니가 계시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너의 외가는 뿌리가 있는 집안이니 송정공(松亭公) 나의 조고(祖考)께서는 일찍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도 직언(直言)을 하신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내셨다.” 그런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소상히 그리고 확실하게 가르친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어머니의 바른 가르침이 십청헌도 중종(中宗) 임금의 면전에서조차 경연(經筵) 때에 논어(論語)를 들어 잘못하면 거리낌없이 고치라[過則勿憚改]”고 정암(靜庵 趙光祖/ 1482-1520) 선생을 죽인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십청헌은 유배를 가야했었고, 그 아드님 충민공도 올곧은 선비정신과 직필(直筆)의 사관이었으니 당쟁의 희생으로 젊어서 사사(賜死)될 정도였다. 어머니와 외가의 선조 송정공의 정신과도 일치하지 않는가.

   정말이지 진천송씨 이 할머니가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외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지는 않았다 해도 훌륭한 정신과 친정의 이야기를 바르게 가르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에는 송정공을 둘러싼 인맥(人脈)과 연척(緣戚) 또한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로 얽혀있기도 했었다. 그 많은 관계를 좁은 지면에 다 기술할 수가 없지만 진천송씨의 정선공과 그 외손 십청헌공의 직접적인 인척만 간단히 살펴도 쉽게 짐작하게 된다.

   송정공의 가까운 친구 양촌(陽村 權近/ 1352-1409) 선생은 조선초기에 대단한 문명(文名)을 날렸으니 십청헌은 물론 그 시대에 모르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 진천송씨 할머니의 친정어머니가 안동권씨였고, 바로 양촌 선생 사촌의 손녀이다. 아마도 송정공께서 넷째아드님 정선공을 친구 양촌 집안으로 혼사를 맺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진천송씨 할머니는 친정어머니의 인연과 그 스토리를 잘 알았을 터이니 자녀들에게도 이야기했을 것 같다.

   지금의 시대적 현상도 외가 쪽으로 친근해지고 있는데, 이 조선 초기에는 아들딸 차별없이 재산을 분배했고, 그때의 족보를 보아도 아들 선호가 아니라 구별없이 아들딸을 순서대로 배열하였으며, 딸들의 후손을 4대까지 족보에 입록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진천송씨의 가장 오래된 계축보(癸丑譜 1673년 간행)에는 딸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똑같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 진천송씨 할머니는 친정 쪽과 연관한 혼사(婚事)에도 많이 참여한 것 같이 족보에 나타난다. 맏사위는 전주이씨 종실(宗室)의 부산수(釜山守 淑)를 얻었는데, 친정삼촌인 부승공(副丞公 )의 둘째사위 백성군(栢城君 源)의 동생이었다. 다시 말하면 따님과 친정질녀가 시집에서는 동서지간(同壻之間)이 되게 했다는 뜻이다.

   김세필 선생의 시호(諡號)가 문간(文簡)이라 경주김씨 문간공파의 행사인데, 묘역은 맨 위의 김세필 선생 선비(先妣) 진천송씨로부터 밑으로 총총히 내려오면서 잡초 하나 없이 청결하고 우거진 도레솔로 아름답게 꾸며 놓아서 더욱이나 인상이 깊었다. 외가를 잊지 않도록 교육이 철저하셨던 진송(鎭宋)의 따님의 위대함을 크게 인식하는 기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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