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신공왕후 삼국지위지동이전으로 재해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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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신공왕후 삼국지위지동이전으로 재해석 한다)

송은도 0 5203
일본서기는 임나일일본부가 기록되어 있고, 일본이 야마토 (邪馬壹 또는 大和) 고대왕국 시기에 신공왕후 (3세기 중반)가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고, 4-6세기 야마토 왕국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 (일본서기에는 임나로 표기)국을 식민지로 200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위지 왜인전>에 수록된 비미호를 신공왕후라고 수록 하였는데, 이미 그 부분을 밝혔으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다시 살펴보며, 신공왕후를 재조명 하고자 한다.
먼저 위서는 중국 위(魏)·촉(蜀)·오(吳) 3국의 정사(正史)로써.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 하였다. 구성은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이다.
이 사서는 열전편에 부여,고구려, 백제, 마한, 변한, 진한, 읍루 등이 있고, 한편 일본에 해당하는 왜인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자국 중심의 편향적 사관이 아닌, 그 당시 모습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고대사의 기록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도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왜인전>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國有市, 交易有無, 使<大倭>監之. 自<女王國>以北, 特置一大率, 檢察諸國, 諸國畏憚之. 常治<伊都國>, 於國中有如刺史.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 及郡使<倭國>, 皆臨津搜露, 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 不得差錯. 下戶與大人相逢道路, 逡巡入草; 傳辭說事, 或 或 , 兩手據地, 爲之恭敬. 對應聲曰噫, 比如然諾.

나라에 시장이 있어 교역이 유무하다. '대왜'가 이를 관리한다. '여왕국'의 북쪽에 특별히 큰 기관하나를 두는데, 여러 나라를 살피는 것으로 여러 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하고 꺼린다. '이도국'을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와 같은 것을 항상둔다. 왕이 경도나 '대방군' 여러 '한국'과 '왜국'의 군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에게 하사하는 물건과 문서를 보내와 전하는데, 섞임이 없었다. 하호들이 길에서 대인을 만나면 뒷것을질쳐 풀속에 들어간다. 전하는 말로 혹은 웅크리고 있거나 엎드려있는데 양손을 땅에 대어 공경을 나타낸다. 대답할때는 '아' 그러는데 이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도 역시 본래는 남자가 왕이었다. 칠팔십년후에 '왜국'에 난이 있어 서로 공격하고 벌하며 지내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일명 '비미호'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이미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자 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림을 도왔다. 왕으로써 왔는데 보았다는 사람은 적다.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其年十二月, 詔書報<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卑彌呼>: <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市牛利> 奉汝所獻男生口四人, 女生口六人, 班布二匹二丈, 以到. 汝所在踰遠, 乃遣使貢獻, 是汝之忠孝, 我甚哀汝. 今以汝爲<親魏倭王>, 假金印紫綬,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其綏撫種人, 勉爲孝順. 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 道路勤勞, 今以<難升米>爲率善中郞將, <牛利>爲率善校尉, 假銀印靑綬, 引見勞賜遣還.


'경초'이년 유월 (서기 238년)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등을 보내어 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그해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에게 말하길 ' '친위왜왕 비미호' '대방태수 유하'가 대부 '난승미'와 다음사신'도시우리'를 보내와 남자 4명과 여자 육명, 포 두필이장을 받치니 이에 이르렀다. 당신이 있는 곳이 먼데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니 당신의 충효가 이와 같아, 내가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당신을 '친위왜왕'을 삼는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에게 보내는 것이니, 당신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당신이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를 솔선교위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 보내는 바이다.


<正始>元年, 太守<弓遵>遣建忠校尉<梯儁>等奉詔書印綬詣<倭國>, 拜假<倭王>, 幷齎詔賜金·帛·錦 ·刀·鏡·采物, <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 其四年, <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 上獻生口·倭錦·絳靑 · 衣·帛布·丹木· ·短弓矢. <掖邪狗>等壹拜率善中郞將印綬. 其六年, 詔賜<倭><難升米>黃幢, 付郡假授. 其八年, 太守<王 >到官.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


'정시' 원년 (서기 240년) '태수 궁준'이 건중교위 '제휴'등을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왕'에게 절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사년 (서기 243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팔인을 보내서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다. 이에 '액사구' 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육년에 조서를 내려 '왜국'의 '난두미'에게 황기를 주고, 부군을 주었다. 팔년 (서기 247년)에 태수 '왕기'가 와서 보고하기를, '왜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가 생겨 '왜국'에서는 '재사', '오월' 등을 보내서 그들의 서로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고 하였다.

遣塞曹 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 拜假<難升米>爲檄告喩之. <卑彌呼>以死, 大作 , 徑百餘步,  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 年十三爲王, 國中遂定. <政>等以檄告喩<壹與>, <壹與>遣<倭>大夫率善中郞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 因詣臺, 獻上男女生口三十人, 貢白珠五千, 孔靑大句珠二枚, 異文雜錦二十匹.

 
이에 색조연사 '장정'등을 보내서 조서와 황기를 내려 '난승미'에게 벼슬을 주고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비미호'가 죽자 (서기 249년)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 명을 순장했다. 뒤를 이어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희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서 이 때 죽은 사람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비미호'의 일가 딸이 되는 '대여'를 세웠다. 이때 대여의 나이는 겨우 십삼세였는데 비로소 나라안의 인심이 정해졌다. '정' 등이 '대여'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더니, '대여'는 '왜국'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삼십명을 '정'에게 보내 와서 뵙고 포로 삼십명과 흰 구슬 오십덩이, 청대구주 두장, 이문잡금 이십필을 바쳐 왔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①위 내용은 일부만 발췌한 것으로, 비미호 여왕이 '이도국'을 직접 다스리며, '왜'는 일본열도 내의 여러 소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②'대왜'에서 시장을 관리하여 다른 나라는 눈치를 살핀다고 하였다.
③ 왜국은 본래 남자가 왕이었는데, 왜국에 '난'이 발생하여 서로 죽이는 전쟁을하다, 여러 소국은 여자 비미호를 왕으로 추대했다. (우리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왕 <서기 174년>에 왜에서 비미호가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으니, 대략 이무렵에 비미호가 왕으로 추대된 것으로 보인다.)
④서기 238년에 왜여왕 비미호는 사신으로 대부 난미승을 대방 태수 궁준에게 보내 위나라에 조공할 의사를 전한다. 즉, 아직 초면이라 직접 사신을 중국 황실에 파견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 변방에 있는 태수에게 사전 허락을 물어본 것으로 보인다.
⑤서기 240년 대방 태수 궁준이 위 황실에서 파견한 사자의 자격으로 조서와 인수를 왜에 전하고,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즉 위 황제가 왜여왕의 조공과 교역을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왜여왕 비미호는 감사의 표문을 올린다.
⑤서기 243년 왜 여왕 비미호는 사신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팔인을 위에 보내서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조공한다.
⑥서기 247년 왜여왕 비미호와 일본 내에 있는 또다른 나라인'구노국'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가 생겨 서로 전쟁이 시작되고, 이때 왜 여왕은 중국 변방의 태수 왕기에서 이 사실을 알려 전쟁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⑦서기 249년에 비미호가 죽었다.
서기 249년에 '왜 여왕 비미호'가 죽고 남자 왕을 세웠으나, 또 다시 전쟁이 계속되어, 결국 비미호의 친척 딸 13세 소녀 '대여'를 왕으로 추대한다.

일본은 위서 왜인열전에 나오는 비미호를 신공왕후로 일본서기에 기록 하였다. 그리고 신공왕후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7개 임나, 침미다례 (제주도)등을 격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 하였다고 하는데, 위서의 왜인열전을 보면, 그 당시 일본은 왜 여왕 비미호가 30여개 소국을 대표로 다스리고 있으나, 일본열도는 비미호가 다스리는 영역 이외에 비미궁호소왕이 다스리는 '구노국'이 있으며, 구노국과 사이가 좋지않아 전쟁을 한다. 그 당시 '왜 여왕 비미호는' 일본열도 내에 함께 있는 '구노국'에 의해 고전을 격는 상황이라 위나라의 지방 태수 왕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위 황제가 색조연사 '장정'을 왜에 파견하여 전쟁을 중지하는 조서와 황기를 내려 서로 화친토록 한 것이다.

위지 왜인열전을 보면 그 당시 '왜'는 통일국가 이전 단계로, 국력이 미비하여 1년 내에 한반도 남부와 제주도를 정벌할 정도의 해군력을 지닌 상태가 아니었다.

기록에 색조연사 장정이 보이고, 그가 전쟁을 중지하기 위해 '왜'에 파견되는데, 왜에 머물면서 그 사정을 보고 돌아온다.
이때, 장정은 '왜'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이 13세 소녀 '대여' (이요)가 통치 잘할 수 있도록 정치와 학문을 가르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즉, <왜인 열전>은 당시 '왜'에 사신으로 건너간 장정이 그곳에 오랫동안 체류한 덕분에 자세한 내용을 수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신공왕후 (비미호)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것이, 바로 서기 249년으로 여와 비미호가 죽고, 13세의 소녀 '대여' (이요)가 여왕에 즉위한 해이다.

그럼 위 나라 사신 장정은 당시 '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만약 왜 여왕 비미호 (히미코)나 대여(이요)가 군사를 일으켜, 1년만에 신라, 7개 가야, 침미다례 등 9개국을 정벌하고 한반도 남부를 휩쓸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위나라 황제에게 즉보해야할 상황이다.
그 당시 저 정도의 해군력과 군사력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것은, 위 나라에게도 엄청나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 (왜인열전)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삼국지 왜인전은 위나라 사절 장정 일행이 직접 야마토에 와서 수년간 체류하며 직접 관찰한 것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상세하고 정확함을 인정하는 자료이다. 그런데 이 자료에 히미코 여왕이나 이요 여왕이 한반도 남부를 침공 점령했거나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당시 '왜'는 같은 일본열도 내에 있는 이웃 구노국의 침입도 막아내기 어려울 만큼 약했고, 당연히 신라 정벌을 염두도 못 내는 약소국 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임나정벌론은 후대에 의해 누군가 만들어낸 허구이다.
어떤 이유로 일본서기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절에 신공왕후가 있었고, 그녀가 한반도 남부를 휩쓸어 임나를 지배했다고 하였는지 그 정확한 의도는 모른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신라와 가야, 침미다례는 그들의 정복 대상자 였고, 백제는 정복대상자가 아니라, 오히려 협력군이고, 백제에서 파견한 장군들이 그 전쟁에서 승리 했으며, 임나를 정벌한 이후에 백제왕과 왕자가 암반에 올라 임나의 맹세서약식을 주관한 것이다.
물론 일본서기에는 백제와 임나소국의 일본천황가에 대한 맹세서약식으로 표현 했지만, 그것은 맹세서약이 아니라, 사실 전쟁 승리한 후, 영토를 확장하였으니 국조신과 하늘에 감사를 올리는 제사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정벌의 주체는 '왜'가 아니고, 백제 근초고왕과 근수구왕자의 업적인데, 그들이 차용해 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응신왕과 인덕왕으로 추정되는 전방후원의 거대묘가 발견 되었는데, 이 거대묘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릉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이전으로 보이는 왕릉은 일본에 없다. 그래서 응신왕을 통일왕조의 건국 시조로 보고있는데, 이 왕릉에서 나온 유물들은 4세기 후반의 한반도 유물과 유사하며, 4세기 후반이면 백제 근초고왕 이후이다.

한편, 일본서기는 1대 신무왕이 천손이라고 하나, 배로 바다를 건너 열도에 일본국을 세웠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신무왕은 응신왕의 개국설화를 연장시켜 놓은 것으로 볼수 있는데, 그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도달한 응신왕은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과 어떤 인연이 있는것은 아닐까.

우리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근초고왕, 근구수왕, 성왕의 공적이 간략하다.
물론 업적이 별로 없었다면 공적도 적겠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위 왕들에 의한 행적이 삼국사기 보다 훨씬 다양하다.
즉, 일본서기는 백제 왕들의 업적을 차용하여 일본국왕의 업적으로 둔갑시켜 놓고, 백제는 일본의 번국 이었으며, 백제가 번국의 자격으로 일본의 임나확장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바꿔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선조이신 신라왕실은 삼국통일에만 만족하였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재나 고서를 수집하여 이를 보전하고, 사서를 새롭게 정비하는 작업을 등한시 하였다.
그러다 보니 1145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며, 자료가 빈약하고 유실된 자료가 너무 많아, 백제 왕실의 치적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 한것으로 보인다.

이러다 보니 오늘 날 위작으로 가득한 일본서기를 우리 삼국사기로 대적하기 어렵운 결과까지 온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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