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송씨통사-은황조 역사와 황실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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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송씨통사-은황조 역사와 황실계보

송은도 0 4615

■ 제후에서 천자로 성장하는 은(殷) 황조
설(契)부터 성탕(成湯)에 이르기까지 여덟 차례 도읍이 옮겨졌고, 탕이 비로소 박(亳)에 도읍을 정하였다.이는 선왕이 있던 곳을 따른 것이라 한다.
탕은 제후들을 정벌했다. 갈(葛)의 우두머리가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湯)은 그를 정벌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상(商)나라 천을(天乙)왕은 주위의 제후들을 제압하고 나라가 커지며, 훗날 여러 제후로 부터 조회를 받아 천자가 되었으니 성탕제(成湯帝)라 한다. 
 
■ 은(殷) 황조계보 및 역사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 이다.
천자의 나라는 황제이고, 그 역사는 본기이며, 계보는 황족이라 한다.
본래 상(商)의 시조 설은 오제(五帝) 시절 순제(舜帝 순임금)에게 제후로 임명되고, 자씨(子氏)성을 하사 받아, 상(商)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제후국으로 왕조이나,
설의 13代孫 천을(天乙)왕이 하(夏)의 걸제(桀帝, 걸왕)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여 천자가 되어 성탕제(成湯帝)가 되었으니, 은(銀)은 황제의 나라요 그 계보는 황족으로 부른다.
  
사마천 <사기>에는 상(商)왕실의 계보와 은(殷)황실의 계보가 수록되어 있으니, 이를 밝혀 아래에 쓰고자 한다. 
먼저 상(商)왕실의 계보는 지난 글에 이미 밝혔으나, 다시 이곳에 간략하게 기록한다.
은(殷) 황족은 곧 상(商)왕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상(商) 왕실 계보◆
설(契) - 소명(昭明) - 상토(相土) - 창약(昌若) - 조어(曹圉) - 명(冥) - 진(振) - 미(微) - 보정(報丁) - 보을(報乙) - 보병(報丙) - 주임(主壬) - 주계(主癸) - 천을(天乙), 성탕(成湯)

◆은(殷) 황실 계보◆

1代.성탕제(成湯帝) = 천을(天乙)왕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며 주색에 빠져 지내자, 제후국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탕이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인솔하니 이윤(탕의 신하)도 함께 따라나갔고, 탕은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나서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하였다. 탕은 탕서(湯誓)를 지었는데, 그 때 탕이 "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칭했다.
걸왕이 유융의 허(虛)에서 패하여 명조로 달아나자 하군이 지리멸렬해졌다. 탕이 삼종(당시 걸왕에게 충성하던 제후국)을 정벌하여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탕의 신하인 의백과 중백이 보전(寶典)편을 지었다. 탕이 하를 정벌한 다음, 하의 신사(神社)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하사(夏社)편을 지었다. 이윤이 바른 정치를 공포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하였고, 드디어 탕이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전국을 평정하였다.
탕이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하였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결정하였다.

2代.외병제(外丙帝)
탕이 붕어했을 때 태자(太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이 즉위하니, 이 이가 바로 외병제이다.

3代.중임제(中壬帝)
외병제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제의 동생 중임이 즉위하여 중임제가 되었다.

4代.태갑제(太甲帝), 태종(太宗)
중임제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붕어하자 이윤(탕의 신하)은 태정의 아들 태갑을 즉위 시켰다. 태갑은 성탕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제가 되었다. 태갑제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니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고 3년 동안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제가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자, 이윤은 태갑제를 영접하여 그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제가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제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 3편을 지었고, 태갑제를 기리어 태종(太宗)이라고 칭했다.

5代.옥정제(沃丁帝)
태종이 붕어하자 아들 옥정이 즉위하였다.

6代.태경제(太庚帝)
옥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태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경제이다.

7代.소갑제(小甲帝)
태경제가 붕어하자 아들 소갑이 즉위하였다.

8代.옹기제(雍己帝)
소갑제가 붕어하자 동생 옹기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옹기제이다. 은 왕조의 국세가 쇠해지자 제후들 가운데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가 생겼다.

9代.태무제(太戊帝), 중종(中宗)
옹기제가 붕어하고 동생 태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제이다. 태무제는 즉위하여 이척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게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태무제가 이척의 말대로 하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를 칭찬하였다. 무함은 왕가의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함애와 태무를 지었다. 태무제가 태묘(太廟)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을 지었다. 태무제의 대에 와서 은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어 제후들이 은나라에 복종하게 되었기에 태무제를 중종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10代.중정제(中丁帝)
중종이 붕어하자 아들 중정이 즉위하였다. 중정제는 오로 천도하였다. 중정제 이후로 적자계승제가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니, 제위계승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되어 이후 구세(九世)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게 되었다.

11代.외임제(外壬帝)
중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제이다.

12代.하단갑제(河亶甲帝)
외임제가 죽자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제이다. 그는 상(相)으로 천도하였다. 하단갑제 시기에 은의 정치는 다시 쇠락해졌다.

13代.조을제(祖乙帝)
하단갑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을이 즉위했는데, 조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다시 부흥하였다. 형(刑)으로 천도하였다.

14代.조신제(祖辛帝)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이 즉위하였다.

15代.옥갑제(沃甲帝)
조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옥갑제이다.

16代.조정제(祖丁帝)
옥갑제가 붕어하자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 조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정제이다.

17代.남경제(南庚帝)
조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남경제이다.

18代.양갑제(陽甲帝)
남경제가 붕어하자 조정제의 아들 양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양갑제이다. 양갑제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19代.반경제(盤庚帝)
양갑제가 붕어하자 동생인 반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반경제이다. 반경제 시기에 은 왕조는 이미 하북에 도읍했는데, 반경제는 다시 하남으로 천도하여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은 왕조는 이미 다섯 처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원망하며 또 다시 이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경제가 제후와 대신들을 타일렀다. "예전 고후이셨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그분들이 제정한 법도는 따를 수 있는 것이었소. 그런데 지금 선왕의 법도를 저버리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수 있겠소?" 이에 하남으로 옮기어 박을 정돈하고 탕의 법령을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 왕조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된 것은 반경제가 성탕의 덕정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20代.소신제(小辛帝)
반경제가 붕어하자 동생 소신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신제이다. 그러나 소신제가 즉위한 후, 은나라가 다시 쇠락해지자 백성들은 반경을 사모하며 반경 3편을 지었다.

21代.소을제(小乙帝)
소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소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을제이다.

22代.무정제(武丁帝), 고종(高宗)
소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무정이 즉위했는데, 무정제는 부열을 등용하고, 정사를 바로잡으며 은덕을 베푸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고, 은나라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23代.조기제(祖己帝)
무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기가 즉위하였다. 조기는 무정제가 꿩이 정(鼎)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고종이라고 칭하고 고종융일과 고종지훈을 지었다.

24代.조경제(祖庚帝)
조기제가 붕어하자 동생 조경이 즉위하였다.

25代.갑제(甲帝)
조경제가 붕어하여 동생 조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갑제이다. 갑제는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므로 은왕조가 다시 쇠하게 되었다.

26代.늠신제(凜辛帝)
갑제가 세상을 떠나니 아들 늠신이 즉위하였다.

27代.경정제(庚丁帝)
늠신제가 붕어하자 동생 경정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정제이다.

28代.무을제(武乙帝)
경정제가 죽자 아들 무을이 즉위했는데, 이때 은은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하였다. 무을제는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하였다. 또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서 이를 사천(射天)이라고 명명하였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 사이를 수렵을 갔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자 그 소리에 놀라서 죽고 말았다.

29代.태정제(太丁帝)
무을제가 죽자 아들 태정이 즉위하였다.

30代.을제(乙帝)
태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을이 즉위하였다. 을제가 즉위하자 은 왕조는 더욱 쇠퇴해졌다.

31代.신제(辛帝), 주제(紂帝)
을제의 큰아들은 계(啓)였으나, 계의 모친이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은 이름이 신(辛)이다. 그의 모친이 을제의 정후였기 때문에 그가 태자가 되었다. 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신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제이고, 세상에서는 그를 '주'(紂)라고 부른다.
주제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었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하여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 못하다가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를 총해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기녀원)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도록 하였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조가성에 쌓은 높은 단)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지명)를 곡식으로 채우게 하였다. 게다가 여기 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무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지명)의 원대를 크게 확장하여 여러가지 야수와 새들을 모아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 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새도록 술을 마시며 놓았다.
주가 포악해지자 제후들이 그를 떠났고, 주(周)의 무왕(武王)에 의해 정벌당하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무왕은 달기를 처형하고, 주에 의해 갇힌 기자를 풀어줬으며 주의 아들 녹보 무경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무왕이 천자가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군주를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王)으로 낮추어 불렀다.

 
■ 은(殷) 황조의 멸망과 송(宋)나라의 건국
은(銀)나라는 신제 (주제, 주왕) 시기에 이르러,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한다.
주나라 무왕은 신제의 아들 무경에게 봉토를 주워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토록 하고, 자신의 동생 관숙과 채숙을 파견하여 무경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 하도록 감시하게 하였다.
주나라 무왕이 죽고, 아들 성왕이 즉위 하였으나 성왕은 나이가 어려 무왕의 동생 주공이 섭정을 하였다. 이때 관숙과 채숙은 주공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 할 것이다. 의심하여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은황실의 황족으로 을제(乙帝)의 장남이며, 무경의 백부가 되는 미자 (본명: 계)는 은황실에서 사용한 제기를 성왕에게 받치며 항복하고 반란군을 진압한다.
무경, 관숙, 채숙의 반란이 진압되고, 주나라 성왕은 은(殷)을 둘로 나누어, 미자는 송(宋)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은왕실의 종묘와 사직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의 숙부 강숙(康叔)을 위(衛)에 봉하였다. 한편 은황실의 황족 기자 (미자의 친적)는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왕이 되었다.
이로써 동이족은 상(商)나라 - 은(殷)황조를 거쳐 미자의 송(宋)나라, 기자의 조선(朝鮮)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기>의 [은왕조 본기]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太史公曰
태사공 (사마천 집안의 관직:태사령)이 말하기를 <=> (의역: 사마천 내 자신이 아는것을 말하면) 사마천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벼슬을 지냈는데, 그 관직이 태사령 이다.
따라서 사마천의 관직도 태사령 이며, 그 부친 조부도 관직이 태사령 이었다.
 
為子姓,其後分封,以國為姓,有殷氏、來氏、宋氏、空桐氏、稚氏、北殷氏、目夷氏。

설은 자씨성 이다. 그 후손들이 나뉘고 나라 이름으로 성씨를 하였으니, 유은씨, 래씨, 송씨, 공동씨, 치씨, 북은씨, 목이씨 이다.
 
한편 <사기>의 [송미자 세가]편에 의하면 미자는 본명이 계(啓)로 은 황제 을제(乙帝)의 장남이며, 은(殷)이 멸망한 후, 주나라 무제 (무왕)에 의해 은(殷)을 분할하여 송 (宋)지역을 하사받고, 송(宋)나라의 왕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은(殷)나라는 동이(조선)의 나라요. 은황실의 후손이 여러 성씨로 나뉘어 지는데, 그 중 나라 이름으로 성씨하여 송씨, 은씨가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 송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가 아니며, 동이 (고조선)의 성씨이고, 상(商)왕실의 후손이요, 은(殷)황족의 후손이며, 송(宋) 왕실의 후손이 된다.
 
이젠 더 이상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신라 귀화설을 우리 송씨의 시조로 삼지 않아야 한다.
호부상서 이면 오늘 날 재무부장관으로 그 당시 정2품의 고관이나, 이상하게 그 나라 역사서 신.구당서에는 이름이 한 차례도 없다.
그리고, 우리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당나라의 호부상서 송씨가 귀화 했다는 귀절도 없다.
한편, 여산, 은진, 진천 송씨 집안의 옛 족보를 보더라도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귀화설은 없다.
다만, 1970년대 이후 발간 된 <송씨통사>와 몇개 집안의 족보에 수록되어 있을 뿐 이다.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신라 귀화설이 탄생한 궁극적 배경은,
"중국은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천자를 모시는 신하국 인데, 신하국의 자손으로 감히 천자의 후손이라 할수 없다"라는 썩어빠진 중화주의와 명나라 사대주의 때문에 느닷없이 등장한 거짓말 이다.
따라서, 송주은 귀화설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만도 못한 사기극 이고, 이 집안 뿐 아니라 이 나라 대한민국을 망쳐먹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중국은 동북공정프로젝트라는 민족을 잡아먹는 정책을 펴며, 현재 고조선, 가우리,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 역사에 편입 시켜 버렸다.
그리고, 한국의 각 집안에서 발행하고 있는 족보를 중국 내에 반입하여 분석하는 작업까지 마쳤다.
우리나라 성씨 족보들이 소중화주의와 명나라 사대주의에 찌들어 아무런 고증도 없이 <우리 시조는 본래 중국에서 귀화 했습니다>라고 쓰였고, 또한 어느 집안의 경우 고려 태조에게 성씨를 하사 받은 내용이 고려사에 분명함에도 <우리 시조는 중국에서 귀화 했습니다>라고 멍청한 소리를 써놓고 있다. 이를 본 중국은 본래 대한민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그로인해 중국의 귀족들이 조선에 진출하여 토착민을 지배 하였으니, 중국은 상전이요, 조선은 천하의 쌍놈이다는 논리를 내세워, 대한민국은 중국에서 회복해야할 영토하고 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중국인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를 보면 본래 대륙의 동쪽은 동이(조선)이 차지하고 있었고, 동이족이 최초로 대륙에서 정복전쟁을 하여 은(殷)나라를 세우고 천자가 되었다.
물론 이전에 중국인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가 있었으나, 이는 정복국가가 아니다. 이 당시 국제 정세는 부족 연맹 형태로 오제 (五帝) 시절 요임금 (堯帝)이 우(禹)에게 천자를 양위한 것이니, 하(夏)나라는 본래 정복국가 형태가 아니고, 부족연맹국가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륙의 최초 정복 황제는 동이족의 성탕제 이다.   
그런데, 훗날 화(華-중국)족들이 천자를 빼앗은 것이다.
 
또한, 우리 송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며, 본래 천자의 후손 이었으나 나라가 망하여 그 후손들이 대륙과 한반도로 흩어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송씨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며, 대륙에 남아있던 송씨가 중국화 되었을 뿐 이다.
이제 이 나라 이 땅...대한민국에 정착한 송씨는 시조 유래를 올바르게 정립하여, 더 이상 중국에서 귀화한 송씨가 아닌, 동이족의 후손으로 거듭 태어나 중국동북공정프로젝트를 부숴버리고, 올바른 역사의 모습으로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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