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송씨통사-춘추전국 시대 송나라 왕실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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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송씨통사-춘추전국 시대 송나라 왕실계보

송은도 0 7671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르기를
미자 (微子)는 본명이 계 (啓)이며 은황조 을제의 장남이나, 그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황위를 이어 받지 못 하고, 그 이복동생 신(辛)이 황위를 이어 받았다. 라고 전한다.
신 (辛)의 시호는 본래 신제 이나, 세상 사람들이 주 (紂)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는 황제이나 전쟁에 패하여 나라를 빼앗겼으니, 황제의 시호를 버리고, 왕의 시호로 낮춰 부른듯 하다.
 
은나라 말기 신제 (주 왕)는 정사를 올바로 돌보지 않고, 주색과 폭정을 일삼았는데,
이때 공자가 은황실의 3대 충신 이라고 칭송한, 미자, 기자, 비간은 신제 (주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조석으로 간언 하였으나, 오히려 신제 (주 왕)은 비간에게 "충신은 심장에 구멍이 7개가 있다는데, 이를 확인해 보겠다"며 비간의 가슴을 도려내고 심장을 꺼내 죽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기자를 옥에 가두고 또한 이웃나라 제후국 주 나라에서 조공을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주 나라 문왕을 옥에 가두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한편 미자, 기자, 비간은 모두 은황실의 황족으로, 신제 (주 왕)의 이복형제 또는 동복형제 이거나, 숙부 또는 숙질의 관계라고 하였으니,
비록 촌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모두 은황실의 황족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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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 저자 사마천의 초상화

 
한편, 그 동안 우리는 미자와 기자, 비간을 중국인이라 생각하였는데, 본래 동이족 (고조선) 사람 이다.
사마천은 殷曰夷 周曰華 又云 東曰夷 西曰夏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은나라는 동이(고조선)요, 주나라는 화 (중국)이다. 또 말하여 동이 (고조선)는 동쪽에 있고, 하 (중국)는 서쪽에 위치 하였다>는 것이니,
은황실의 황족 미자, 기자, 비간은 모두 동이 (고조선) 사람이다.
 
신제의 폭정에 불만이 쌓인 주나라 무왕은 주변의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은나라를 공격하니, 신제 (주 왕)는 이에 대항 하였으나, 군세가 밀려 패하자 성안으로 도망쳐 녹대에 올라 보옥으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 쓰고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가 목숨을 끊었다.
주나라 무왕은 신제 (주 왕)의 시체를 찾아 머리를 베어 커다란 흰색 기에 매달고,
옥에 갖혀 있던 기자 풀어주며, 비간의 무덤은 봉분을 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정벌한 뒤,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신제 (주 왕)의 아들 무경에게 봉토를 내 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잇게 하도록 하고, 자신의 숙부 관숙 (菅叔)과 채숙 (蔡叔)을 은나라에 파견하여 무경의 동태를 관찰토록 하였다.
 
그러나 주나라 무왕이 죽고,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무경과 관숙, 채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미자는 그 반란이 덧없이 부질하고, 백성의 헛된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은황실의 제기를
주나라 성왕에게 받치며 항복을 하였다.
 
이후 무경과 관숙, 채숙의 반란은 진압 되었고, 이후 주나라 성왕은 미자에게 은황실의 종묘와 사직을 잇도록 하고, 나라 이름을 송 (宋)이라하며 미자를 왕에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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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무왕은 은을 정복하고, 은황족 미자를 송나라의 왕으로 명하여 은의 종묘와 사직을 지키도
 록 하였다>
 이 무렵 주나라 무왕은 천자에 오르고, 주변국을 제후로 임명하는데 이를 춘추전국 시대라 한다.

그 이전에 옥에서 풀려난 기자는 은나라에서 망명하여 조선왕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다.
우리는 기자가 중국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왕으로 책봉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기를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조선 왕으로 명하였으나, 기자를 신하로 삼지는 못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 왕으로 세운것이 아니다.
기자는 은나라에서 무리를 이끌고 망명 후, 스스로 조선 왕에 올랐으며, 고대국가 시절 외교적 관례상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 왕으로 인정하는 조서를 내렸을 뿐 인데, 마치 기자를 조선왕으로 세운 것 처럼 잘못 인식한 것이라 할수 있다.
 
이성계는 스스로 개국하고 태조가 되었는데, 명 나라 황제는 이성계에게 조선이라는 국호와 국왕을 인정하는 조서를 내린다.
그렇다고, 명 나라 황제가 이성계를 조선왕으로 올리고, 조선을 개국 시켜 준 것이 아니다.
이성계 스스로 조선을 개국하고, 왕이 되었는데 명 나라 황제가 이를 인정하는 조서를 내렸을 뿐 이다.
따라서, 기자조선 또한 외교적 관례에 따른 조서와 책봉 관계이며, 주 나라 무왕이 직접 기자를 조선왕으로 올린 것이 아니다.
사기에는 <기자를 조선왕으로 명하였으나 기자를 신하로 삼지는 못 하였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자는 주 나라의 제후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사기에 보면 본기편에 <은왕조 본기>가 있고, 세가편에 <송미자 세가>가 있다.
반면, <기자조선 세가>는 없다. 
따라서, 기자는 중국의 제후가 아니라, 중국과는 독자적인 조선국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자는 주나라 성왕에 의해 송나라의 왕위에 올라 은황실의 종묘와 사직을 지키며, 주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기자조선은 40여대를 흘러 존속하였으나, 준왕에 이르러 중국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쫓겨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것이 위만조선 이다.
 
한편, <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편은 [위략]의 내용을 인용하여
<기자의 후손 준왕은 위만에게 쫓겨 마한 지역으로 망명하여, 성을 한씨 (韓氏)라 하고,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으며, 준왕의 아들과 친척들이 韓을 성씨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이 바로 오늘 날 청주한씨 (靑州韓氏)이다.
 
이부분에 대한 원문은 아래와 같다.

 

三國志卷30-魏書30-烏丸鮮卑東夷傳第30-韓(馬韓)-07/02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해설)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다, 연나라 망명인 위만의 공격으로 빼앗겼는데,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이라 높혀, 동쪽의 땅을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역으로 연을 공격하여 주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간하여, 멈췄다. 예를 서쪽으로 보내 연을 설득하므로, 연도 그쳐,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모질어지자, 연이 장수 진개로 하여금 서방을 공격하게 하여, 땅 2천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에 비가 됐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해 진에 정략적으로 복속하였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왕위에 올랐다.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해설)

이십여 년 후에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니 천하가 어지러워,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다, 점점 준에게 망명하여 가니, 준이 서쪽에 이들을 배치(살게)했다.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으로 세우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와서 항복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여 설득하기를, 중국망명자를 모아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하니, 준이 믿고 사랑하여, 박사 벼슬을 내리고, 규를 주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장으로 삼았다. 만이 망명한 무리들을 꾀어,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 준에게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 길로 쳐들어 온다하여, 궁에 들어 와서 숙위하기를 간청하고는,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했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좌우궁인을 이끌고 도주하여 바다를 건너 한(韓)의 땅에 거해,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 위략에 말하길 "그 아들과 친척으로서 그 나라에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성을 한씨라 했다. 준이 바다 밖에 있은 후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 후로 (왕계가)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인(韓人) 중에 그대로 제사지내는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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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7웅 전국시대 이다. 연나라에서 위만이 준왕시절 기자조선에 망명 하였다. 이때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조선의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으나, 위만은 연에서 많은 세력이 망명하자, 이들 세력을 규합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준왕을 쫓아냈다. 이에 준왕은 한반도 남쪽 마한으로 망명하고, 성씨를 韓이라 부르고, 스스로 한왕 (韓王)이라 하였다. 청주 한씨의 유래이다.


또한 <청주한씨세보>에 의하면
기자의 제48대손에 우량(友諒), 우성(友誠), 우평(友平)의 3형제가 있는데, 이들이 각각 선우씨. 기씨. 한씨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즉, 태원 선우씨 (太原鮮于), 행주 기씨 (幸州奇氏), 청주 한씨 (淸州韓氏)는 모두 기자(箕子)에 연원을 두고 있다.
청주한씨 세보에 의하면 선우씨의 선대세계는 기자조선 48대 왕위와 마한 9대 왕위로 되어 있는데, 마한 9대 원왕 (元王)은 곧 기자의 48대왕으로 선우씨의 세보와 한씨의 세보가 서로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송씨, 은씨, 선우씨, 기씨, 한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가 아니라, 동이족 황제집안의 성씨이며 수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상나라 설 왕의 후손이요. 은황조 성탕제의 후손으로 같은 혈통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상나라의 시조 설은 본래 성이 자씨 (子氏)이나, 그 13代孫 성탕제가 하나라 걸왕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은황조를 열었으며, 그 후손들이 여러 분파로 나뉘며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았으니 송씨 (宋), 은씨 (殷), 내씨 (來), 공동씨 (空桐), 치씨 (稚), 북은씨 (北殷), 목이씨 (目夷)가 되었다고 밝혔다.
 
사기 (송미자 세가)에는 송왕실의 계보가 수록되어 있으니, 이를 정리하여 아래에 쓰도록 한다.
아울러 송씨는 본래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가 아니며,
본래 동이족 (상나라, 은나라) 황제의 후손이며, 송나라 왕실의 성씨로 본래 子씨 성 이었으나, 훗날 나라 이름을 성씨로 송(宋)씨가 되었음을 알리고자 한다.      
 


* 사기 송세가(史記 宋世家)를 기본으로 구성함

01. 송 미자(宋微子) 계(啓)

02. 송 미중(宋微仲) 연(衍)

03. 송 공계(宋公稽) 계(稽)

04. 송 정공(宋丁公) 신(申)

05. 송 민공(宋湣公) 공(共) ☞송 민공(宋愍公) : 한서 고금인표(漢書 古今人表)

06. 송 양공(宋煬公) 이(熙)

07. 송 여공(宋厲公) 부사(鮒祀)

08. 송 희공(宋釐公) 거(舉) [기원전 858년 ~ 기원전 831년]

09. 송 혜공(宋恵公) 한(覵) [기원전 830년 ~ 기원전 800년]

10. 송 애공(宋哀公) [기원전 800년]

11. 송 대공(宋戴公)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66년]

12. 송 무공(宋武公) 사공(司空)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48년]

13. 송 선공(宋宣公) 역(力) [기원전 747년 ~ 기원전 729년]

14. 송 목공(宋穆公) 화(和) [기원전 728년 ~ 기원전 720년] ☞ 송 목공(宋繆公) : 한서 고금인표

15. 송 상공(宋殤公) 여이(與夷) [기원전 719년 ~ 기원전 711년]

16. 송 장공(宋莊公) 풍(馮) [기원전 710년 ~ 기원전 692년] ☞ 송 엄공(宋嚴公) : 한서 고금인표

17. 송 민공(宋湣公) 첩(捷) [기원전 691년 ~ 기원전 682년]

18. 송 전폐공(宋前廢公) 유(游) [기원전 682년]

19. 송 환공(宋桓公) 어열(禦說) [기원전 681년 ~ 기원전 651년]

20. 송 양공(宋襄公) 자보(玆甫), 자보(玆父) [기원전 650년 ~ 기원전 637년]

21. 송 성공(宋成公) 왕신(王臣)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0년]

22. 송 후폐공(宋後廢公) 어(禦) [기원전 620년]

23. 송 소공(宋昭公) 저구(杵臼) [기원전 619년 ~ 기원전 611년]

24. 송 문공(宋文公) 포혁(鮑革) [기원전 610년 ~ 기원전 589년]

25. 송 공공(宋共公) 하(瑕) [기원전 588년 ~ 기원전 576년]

26. 송 평공(宋平公) 성(成) [기원전 575년 ~ 기원전 532년]

27. 송 원공(宋元公) 좌(佐) [기원전 531년 ~ 기원전 517년]

28. 송 경공(宋景公) 두만(頭曼) [기원전 516년 ~ 기원전 469년]

29. 송 소공(宋昭公) 특(特) [기원전 468년 ~ 기원전 404년]

30. 송 도공(宋悼公) 구유(購由) [기원전 403년 ~ 기원전 385년]

31. 송 휴공(宋休公) 전(田)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63년]

32. 송 환공(宋桓公) 벽병(辟兵) [기원전 362년 ~ 기원전 356년]

33. 송 척성군(宋剔成君) 척성(剔成) [기원전 355년 ~ 기원전 329년]

34. 송 강왕(宋康王) 언(偃)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86년] ☞ 송 헌왕(宋獻王) : 순자 왕패편(荀子 王霸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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