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송씨통사-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귀화설은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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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송씨통사-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귀화설은 거짓말

송은도 0 6664
 
<송씨통사>에는 송씨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송씨의 기원은 당나라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이 국난 (755-763년, 당나라 안록산의 난을 뜻 함)을 피하여, 신라 경덕왕 시절 동방의 나라 (신라)에 귀화하여, 그 세계가 열리고 6代孫 순공이
성룡 (여산, 은진, 서산 시조), 흥룡 (연안 시조), 인룡 (진천 시조)의 3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성룡의 증손자  자영은 유익 (여산 시조), 천익 (은진 시조), 문익 (서산 시조) 3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그후 계보를 잃어 유익의 후손 정당문학 (정2품) 숙문을 여산 송씨의 중시조, 천익의 후손 대원을 은진 송씨의 중시조로 한다.
이로써 우리 한국의 송씨는 중국에서 기원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위 송씨통사는 언제부터 기록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 송씨통사의 송주은 귀화설이 정작 사실 이고, 정사에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송씨통사는 비로서 1970년 무렵에 처음 섰으니, 지금부터 40년전만 하더라도 위 와 같은 계보는 없었고, 한편 당나라에서 호부상서 (정2품, 오늘날 재무부 장관)를 지냈다는 송주은의 이름은 그 나라 사서 구.신당서에 단 한차례도 이름이 없고, 우리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당나라 호부상서가 신라에 귀화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위에 보면 송주은의 6代孫이 순공이고, 순공의 세째 아들이 인룡이며, 진천 백으로, 진천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진천송씨 족보에는 순공이 시조이나, 그후 340년간 계보를 읽어버려 인을 그 후손으로 밝힌다고 되어 있다.
 
우리 진천송씨 족보에 대아찬공 諱 순공과 진천백 諱 인 조부는 340년간의 시간 차이가 있는데,
송씨통사는 아들로 하였다.
이것은 송씨통사를 편찬하는 사람들이, 340년간의 공백을 채울 수 없자,,, 인을 인룡으로 바꾸고, 순공의 세째 아들로 편의화 했다는 것을 알수있다.
따라서, 오늘 날 송씨통사의 계보는 위작 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장담하는데,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귀화설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905년 우리나라 조선이 일본과 을사늑약을 맺으며 국권을 상실하고, 1910년에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언제인지 정확한 시기는 모르나,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무렵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에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본래 조선 사대부의 집안이나, 조선의 국운과 함께 집안이 몰락하여 형편이 어려웠다.
 
하루는 10살을 갓 넘겼을 무렵, 그 아이가 동네 인근의 야산을 돌아 다니며, 솔 방울과 잔 나무가지를 주워 책 보자기에 쌓았다. 그것을 본 동네 어른들이, "집에 가서 아궁이에 불을 때려나 보구나. 어린 것이 참 기특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어린 아이가 당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니 이 귀하고 비싼 것을 왜 불에 태웁니까? 이것은 불에 태울 거리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와 동생의 먹을 거리 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동네 어른이 "아니 너희 집 먹을 거리라니, 어째서 그렇더냐"고 물었다.
소년은 "이것을 주워 어느 부자 집에 가져다 주면, 쌀을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것을 왜 아궁이에 넣고 불에 태웁니까"라고 하였다.
 
이 아이의 부지런함과 총명함은 그 마을에 소문이 자자 하였고, 훗날 그 지역 부잣 집 (문화유씨 댁)에 들어가 상단 행수가 되었다.
 
위 문화유씨는 이 동네 토박이로 재산이 만석군 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상단을 꾸려 만주 지역과 무역을 하였으나, 딸만 6명으로 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딸들은 이미 장성하여 모두 시집을 갔는데, 날마다 솔방울을 주워 쌀을 바꾸러 오는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가 점점 자라며, 한문을 스스로 공부하여 깨지고, 주판과 셈에 능통한 것이다.
그래서 문화유씨 어른은 그 청년이 마음에 들어 "나에게 만약 친 손녀가 있다면, 저 청년을 내 손자 사위로 삼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위 문화유씨 어른은 아들이 없고, 이미 장성하여 출가한 딸만 6명 있었다. 그런데, 일찍 출가한 큰 딸의 장녀인 맏 외손녀와 나이가 비슷하니, 그 청년을 맏 외손녀에게 중매 하였던 것이다.
 
이 청년이 20살을 전후하여, 상단 행수로 만주에 가게 되었는데, 그만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옥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다, 상단 행수라 보부쌈과 자금이 넉넉 하였을 것 인데, 일본 순사가 독립 자금을 전달하러 온 것으로 간주하여 재물과 돈을 모두 빼앗고 옥에 가둔 것이다.
 
문화유씨 어른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행수가 만주에서 일본 순사에게 잡혀 그 생사를 모르니, 답답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큰 사위에게 노자돈을 두둑히 주며, 만주에 가서 행수를 무조건 찾아와라 하셨다.
 
장인의 명을 받은 송씨 사위는 그 날로 만주를 향하였다.
그 동안 고문과 학대가 만만치 않았을 테인데, 비록 만신창이 모습이지만 다행히 행수가 아직 살아서 옥에 있는 것이다.
 
송씨 사위는 장인이 "만약 그 아이가 살아 있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라"고 하였으니,
일본 순사에게 하소연 하였다.
"그 청년은 본래 독립군 심부름이 아닙니다. 장사꾼에 불과 합니다. 저 청년이 가지고 있던 재물과 돈은 모두 드리고, 여기 제가 갖고 있는 것도 모두 드릴 테이니. 저 청년의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인에게 받아 온 노자 돈가지 모두 떨어 일본 순사에게 주었다.
쉽게 말해 뇌물 이었다.
 
그리고, 송씨 사위는 일본 순사에게 행수의 석방 약속을 받고, 자신과 만주 여정을 함께한 심부름꾼에게 "내가 이곳 만주까지 와서 구한 것을 행수에게는 비밀로 하게. 그리고 행수에게는 행단 일행은 모두 일본 순사에게 죽었다고 하게. 나는 행단 일행을 데리고 먼저 고향에 내려갈 터이니, 자네는 행수의 몸이 나아지거든 나중에 함께 귀향토록 하라"며 행단 일행을 데리고 먼저 귀향 하였다.
 
한 달후가 되어, 행수가 고향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하고 온 상단 행수는 고향에서도 곤역을 치루웠다.
 
"네 이놈, 우리 장인께서 너에게 노자 돈을 주며 물건을 맞겨, 만주까지 보내었는데, 너는 어째서 빈 털털이가 되어, 거지 꼴로 돌아 왔느냐. 그 돈을 모두 어찌 했느냐. 재물은 어디로 빼돌렸느냐. 바른대로 말 하여라"
 
이 청년은 주위 사람들이 일본 순사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을 빼온 것을 아직 몰랐다.
단순히 자신이 독립 자금 전달 혐의가 없어, 석방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청년은 참 암담 할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에게 잡혔던 일행은 모두 죽었고, 재물은 모두 빼앗겨 빈 몸으로 돌아왔으니, 고향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듯 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내가 그 돈을 벌어 변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예 사실대로 고하겠습니다. 제가 만주에 갔는데 투전꾼에 속아 모두 탕진 했습니다. 이몸 죽어 마땅하오나, 고향에서 저를 만주로 보낸 분들이 재물과 돈이 궁굼하실 껏 같고, 죽기 전에 저의 어머니 얼굴을 한번 보고자. 염치불구하고 돌아 왔습니다. 이젠 어머니도 뵈었으니 이놈을 죽여 주십시요."
 
"뭐라, 자네가 투전판에서 우리 장인이 주신 돈과 재물을 모두 탕진 했다는 것이냐.? 그것이 사실이냐, 자네는 지금 돈과 재물을 어디다 빼돌리고, 지금 거짓을 말하는가. 바른 대로 말 하여라. 자네가 재물의 숨겨둔 곳을 말하지 않으면 너희 집 재산을 모두 빼앗고, 너와 네 동생을 모두 노비로 팔아 버리겠다"
 
"죄송 합니다. 이몸 죽어 마땅 합니다. 죽기 전에 한말씀 올리면, 그 돈은 모두 투전판에서 탕진 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동생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 어머니의 재산을 빼앗고, 제 동생 마저도 노비로 삼겠다는 것 입니까. 차라리 이 놈을 죽여 주십시요."
 
이후 송씨 사위는  그 행단 행수를 일주일 동안 광에 가두었다.
이쯤되어 송씨 사위는 행수에게 재차 물었다.
 
"돈과 재물을 어디로 빼돌렸느냐. 이제 바른대로 말하여라"
 
그런데 행수의 말은 처음과 똑 같았다.
 
"제가 투전판에서 모두 잃었다 하지 않습니까. 제가 노비가 되어 갑던지, 아니면 손 발을 잘라서라도 갑아 드리겠습니다. 다만 저의 말을 못 믿겠다면, 이 놈을 죽여도 좋습니다"
 
이쯤 되니 송씨 사위의 마음도 흔들렸다. 
"내 당장 너를 죽이고, 너의 동생을 모두 노비로 삼아 마땅하나, 인명은 제천이라 하였다. 어찌 하겠느냐, 그대신 자네는 지금부터 우리 장인 댁에 들어가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할 것이야. 그래서 자네가 탕진한 재산을 모두 갑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자신 있는가"
 
"예, 제가 노비가 되었든, 아니면 제 손 발을 잘라서라도 그 돈과 재물은 모두 변제해 드리겠습니다."
 
이때, 송씨 사위는 만주에 함께 갔던 행단 일행을 모두 불러 들였다.
그 사람들을 본 상단 행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만주에서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모두 죽은 줄만 알았던, 행단 일행이 살아 있지 않는가.
 
"내 일찍히 자네가 일본 순사에 붙잡혀 옥에 갖히고, 돈과 재물을 모두 빼앗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일본 순사에게 빼앗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투전판에 탕진 했다고 하였는가"
 
상단 행수는 그제야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자신의 속 마음을 사실대로 말하였다.
"함께한 일행이 일본 순사에 붙잡혀 모두 죽었고 저만 혼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와서 사실을 이야기 해보았자, 누가 믿어줄 사람도 없을 듯 했습니다. 그래서 투전판에 모두 탕진 했다고 변명하고, 그 대신 그 돈은 나중에 변제해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단 행수의 말을 들은 송씨 사위는 그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 장인께서 일찍이 나에게 저 청년을 사위 삼으라고 하셨는데, 우리 장인께서 역시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구나. 저 청년이면 과히 내 큰 딸의 남편감으로 충분하다" 하셨다.
 
그리고 상단 행수는 만주에서 이상한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을 직접 구하지는 못 하고, 대신 붓으로 필사를 해왔다며, 며칠 후 여러 장의 종이를 내보였다.
 
그 내용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 중 [은왕조 본기], [송미자 세가]로 보인다.
그 책의 내용에서 <아주 오래전에 자씨 성의 설이 있었고, 그 14대손이 탕 인데, 은나라 황제가 되었고, 그 후손 미자가 송나라 왕이 되었는데, 송나라가 망하고, 그 후손들이 은씨,송씨 등을 성씨로 삼았다는 내용이라> 상단 행수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고향에 가면 전달하려고 종이에 필사를 한듯하다.
 
그런데, 그만 일본 순사에게 검문을 당하여,  <사기>의 필사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일본 순사는 <사기>의 필사 내용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편지라고 우기며, 그 돈과 재물을 누가 보냈고, 누구에게 보내는 것이냐며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하여 옥에 가둔 것이다.
 
상단 행수는 그 내용은 편지가 아니라, 책의 내용을 필사했을 뿐이다고 하였으나,
일본 순사는 독립자금 전달 내용 편지 이다며, 옥에 가두고 재물과 돈을 빼앗고, 고문한 것이다.
 
일본 순사가 한문을 잘 모르는 놈 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재물과 돈이 욕심이나 이를 빼앗기 위해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상단행수에게 필사 본을 받은 문화유씨의 사위 송씨는 어째서 송씨의 조상이 옛날에 자씨 이었고, 중국에서 황제를 지내고, 송나라 왕이 되었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 책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진 글인지 몰라. 궁굼했다.
그래서, 자신의 먼 친척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내용이 워낙 특이하여 주위의 여산송씨와 은진송씨들에게 전달되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서 여산송씨, 은진송씨, 진천송씨 등이 모이게 된 것이다.
 
이 무렵만 하더라도, 지방의 시골에는 책이 귀했는지, 그 내용이 어떤 책이고, 무슨 내용인지 몰랐는데, 그 중 일부 학식 있는 몇 사람들에 의해 사마천의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은 상단 행수가 만주에 다녀오며 종이에 적어 온 몇자의 내용은
그 당시 전북과 충남 지역의 송씨들에게는 큰 파장을 불러온 듯 하다.
 
그 동안 송씨의 기원을 알수 없었는데, 이로써 송씨는 모두 같은 조상의 후손이요, 상고 시대부터 존재 했던 성씨라 그 기원을 고증 할수 없었다는 논리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송씨들이 사마천의 <사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이 귀한 시대이다 보니,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모임을 계기로 여러 사람에게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송씨는 모두 형제라는 <송씨통사> 책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그 당시 공부 아주 열심히 한 유생들의 입김 이었다.
 
"중국은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천자를 모시는 신하국 인데, 그 신하국의 백성으로 어찌 감히 천자의 후손이라 논 할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 이미 중국에도 송씨가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 사마천의 <사기>대로 한다면,
한국의 송씨 뿐 아니라, 중국의 송씨도 모두 형제나 다름 없고,
따라서, 중국에서 높은 벼슬을 한 분이, 우리나라에 귀화 한것으로 하자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나라의 기둥, 은나라의 구슬 이라는 뜻을 갖은
당나라 호부상서 宋柱殷 (또는 珠殷) 신라 귀화설 이다.
위 사실이 대략 1940-1945년 사이로 알고 있다. (이 보다 몇 년 빠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무렵 송씨통사는 발간되지 못 하였다.
지난 글에서 밝혔 듯 <자신의 본관이 서로  큰집이다>라고 싸우는 통에 무산 되었는데,
그러나 이때 거론 된 송주은 귀화설은 이후에도 여러 사람 사이에 회자 되었다.
 
그리고 1970년 무렵 <송씨통사>가 발간되며,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이 신라에 귀화한 했다는 것이 정설 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송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가 아니었고, 고조선 (동이족)의 성씨 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殷曰夷 周曰夏 라고 하였으니,
이는 은나라는 동이족 (고조선)이요, 주나라는 하족 (중국) 이다.
즉, 송씨는 동이족의 성씨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최고인 줄 아는 이 나라 망쳐먹는 중화사상과
신하국의 백성으로 감히 중국 천자의 후손임을 자칭 할수 없다는 사대주의 때문에,
마치 우리 송씨가 중국의 성씨이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것 처럼 만든 것이다.
 
중국은 1994년 하남성 안양현 상구지방의 고대유물을 발굴 하였는데,
위 지역이 바로 은나라의 수도 이다.
옛 황실의 무덤 뿐 아니라, 마차, 세련된 청동기, 인물 초상화,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 초기 철기 문화 등이 발굴 되었는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은나라가 동이족이라고 쓰여 있으니, 중국인에게는 눈에 가시 일 것이다.
그래서 나온것이  동북공정프로젝트 이다.
 
동복공정프로젝트의 핵심은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는 모든 민족이 세운 국가는 모두 중국의 역사 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조선, 고우리, 부여, 고구려, 발해는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으로 중국 역사의 일부이고, 이를 중국역사에 편입 시켰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은 중국이 회복해야할 영토라며 한때 중학교 교과서에 실어 교육시킨 적도 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조선족들이, <대한민국이 본래 중국의 일부 였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중국의 지배로 부터 벗어났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우리 한국의 각 집안에서 발간한 족보도 가져가, 그 계보를 옛 중국 사서와 비교하는 작업까지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시조는 중국에서 귀화했습니다... 라고 떠들어 대니,
중국에서는 동북공정프로젝트에 맞추워, "본래 대한민국은 중국 귀족들이 진출하여 지배 하였고, 중국 귀족들의 후손이 지금도 명문 집안을 형성하고 있으니, 중국은 상전이요, 조선은 천하의 상놈들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상고시대 부터 한반도는 중국 변방의 나라이다... 라고 주장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2100년전 이고, 예수가 태어나기 100년전에 중국인 스스로,
은나라는 동이족 (고조선)의 나라요, 대륙의 황제 였으며, 그 후손이 송씨, 은씨가 되었다고 그들의 역사책에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우리 송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가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 성인 것이다.
 
위 글을 읽는 어느 사람들 중에는 <송주은 귀화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전래 되었다고 하실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송씨족보를 봅시다.
 
1653년 (효종 4년) 여산송씨 계묘보가 송씨 족보중 첫번째로 발행 되는데,
1991. 4. 2.자 경기 유형문화제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 족보에 여산송씨 시조는 고려 진사 유익이나 계보를 잃어 정당 문학 (정2품) 숙문을 중시조로 하고있다. 한편 유익의 아우가 은진송씨 조상이다는 내용이 있다.
 
1666년 (현종 7년) 은진송씨 병오보가 송씨 족보 중 두번째로 발행 되는데,
고려 판윤사 대원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한편 우암 문정공 시열 선생도 6대조 비석에 "우리 송씨가 은진송씨 족보를 갖게 된 것은 고려 판원사 대원부터 이다"라고 되어있다.
 
1673년 (현종 14년) 진천송씨 계축보가 송씨 족보 중 세번째로 발행 되는데,
신라 경순왕 시절 대아찬 순공을 시조로 하나, 그 후 340년간 약16대 계보를 잃어, 고려 인종 장군 인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어느 집안 족보를 보더라도, 송주은 귀화설은 없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부터 송주은 귀화설이 전래 되었다고 하는 분들은 도대체 어느 집안 족보를 보았다는 것인지 알수 없다.
 
한편 위 세 집안의 족보에 쓰여있는 중시조 보다 선대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송씨는 신라 말 경순왕 시절부터 성씨가 있었고,
고려 초부터  고려 경인년 무신난 사이에도 송씨가 보이고 있다.
 
따러서, 송씨는 아주 오래전 성씨가 그 계보를 잃어버려 훗날 자손들이 어떻게 분가를 하였는지 알수 없을 뿐이다.
 
신라 송주은부터 오늘 날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생겼다면,
 
신라 경순왕 시절 궁예의 문인으로 활약하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가담하여,
그 공로로 대상 벼슬을 지낸 송함홍은 과연 누구이고,
 
목종(서기 1000년) 과거에 급제 하였다고 고려사에 보이는 송굉(宋翃)은 누구이며,
 
현종(1011) 통사사인(通事舍人),도병마녹사(都兵馬錄使)  지채문 (智蔡文)의 명으로 거란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거란군이 물러 난것을 확인하여 전달한 공로로 왕에게 벼슬을 받았다고 고려사에 전하는 송균언(宋均彦)은 누구이며,
 
현종(1013) 백세가 넘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대광(大匡)의 벼슬을 받은  송능(宋能)은 과연 누구이고.
 
인종(1126년) 이자겸의 난에 대항하여 전사하신 송행충 장군은 과연 누구이고, 어느 계보에 속한 다는 것인지,,
 
여산, 은진, 진천송씨가 족보에 밝히고 있는 각 집안 시조 이전 부터 송씨가 고려사에 보이고 있는데, 이분들은 자손이 하나도 없이 모두 죽었고,
어째서, 송씨통사에서 밝혀진 송주은의 자손은 고려사에 한 명도 이름이 없다는 것인지...
 
아주 오래전 부터 송주은이 귀화 했다고 전한다는 것은 허위로 만든 계보에 억지를 부리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송주은 귀화설은 불과 1940년 무렵 부터 전래 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그 탄생 배경을 보면, 신하국의 백성으로서 감히 천자의 후손이라 할수 없다...는 멍청한 사고 방식 때문 이었다.
 
신하국의 백성이라 천자 후손을 함부로 논할 수 없다면,
당신이 천자로 모시고 있는,,, 중국 왕가 놈들은,,,
본래 우리의 조상이신 고조선 (은나라) 황실을 침략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천자라고 자칭 했던 놈들이다는 것을 먼저 알았으면 합니다.
 
이제 <송씨통사> 뜯어고쳐야 합니다.
더 이상 이 나라 대한민국을 망쳐먹고, 중국 동북공정프로젝트에 빌미를 제공하는 송주은 귀화설 입에도 담지 말아야 합니다.
 
송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가 아닙니다.
사마천은 사기에 분명히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은왕조는 본래 동이족 (고조선)이 세운 나라로, 그 성씨가 자씨 이나,
주왕조 이후에 은왕족 미자가 송나라를 세웠고, 은왕족 기자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 후 은왕조 후손들이 송씨, 은씨 등 나라 이름을 성씨로 하였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송씨는 본래 우리 민족의 성씨이며,
고조선 시대 은나라를 세워, 중국을 주변국으로 여러 제후를 거느린 황실 집안 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귀화 했다는 <송씨통사> 이제 뜯어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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