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남해안 일대의 왜구를 격퇴한 宋徵 (송징)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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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남해안 일대의 왜구를 격퇴한 宋徵 (송징) 장군

송은도 0 4240
 
전남 완도에는 고려 말 宋徵 장군의 전설이 오늘까지 전하여, 해마다 정월 15일 제향을 올린다.
위 제향이 본래 1982년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송징 장군을 주신으로, 정년 장군과 혜일 대사를 부신으로 하였는데, 1994년 완도의 청해진 유물 발굴이 본격화 되며, 이후 부터는 신라 장군 장보고를 주신으로, 송징 장군, 정년 장군, 혜일 대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물론 위 제향 행사는 완도 주민들의 자치행사 이다.
 
완도의 신 장보고 장군, 정년 장군, 혜일 대사는 그 근거가 확인이 되는데,
장보고와 정년 장군은 신라 흥덕와과 문성왕 사이의 인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이름이 보이는 등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데, 1982년까지 완도의 주신으로 모셔졌던 宋徵 장군은 애석하게 기록되지 않아, 업적과 역사적 배경을 알수가 없다.
따라서, 위 분이 어떤 배경으로 완도의 주신이 되었는지 궁굼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송징 장군은 옛 전설이나 시가 등으로 유추할 수 밖에 없는데,
조선시대 문인 임억령 (1496년 生 - 1568년 卒)의 송대장군 시가에 의하여,
송징 장군이 조선 초기 이전부터  완도 주민들에 의해 제향이 모셔졌음을 알수 있고, 그로인해 장군이 고려 말에 살다간 분 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뿐 이다.
 
한편, 완도읍지와 완도 주민들에 의하면,
송징 장군이 고려 원나라 침략시절 몽고와 강화에 반대하여 항쟁 하였던, 삼별초 군대의 장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송징 장군이 삼별초의 장군 이다는 근거는 없었다.
다만 고려 말 장군으로 민간에 전래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송징 장군이 삼별초 장군이 된 배경은  애국지자 小南 (소남) 金營炫 (김영현) (1883년 生~1971년 卒) 선생의 淸海秘史(청해비사) 이다.
소남 선생은 구한말 일제 침략 당시 민중계몽 운동을 하시고, 완도면장을 지내신 분인데, 위 분의 저서 청해비사에 의해 송징 장군이 삼별초 장군이 된 것이다.
 
즉, 완도의 주신 송징 장군의 전설이 1,000년의 세월인데 비하여, 위 분이 삼별초 장군 이었다고 정의한 것은 불과 100년 안팎의 일이다.
 
물론, 소남 선생의 청해비사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문제의 글이 아니다.
청해비사는 일제침략기에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계몽운동을 펼치신 소남 김영현 선생님의 <민족 혼>이 담겨 담겨있는 지역사가 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런데, 정말 삼별초 장군이 1,000년 가까이 완도 민간의 주신으로 가능 했을지 의문점이 있다.
먼저 완도는 신라 흥덕왕 3년 (828년) 무렵 장보고 장군이 1만의 관군으로 청해진을 설치하고,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중동 지역까지 대교역로를 개척한 해상왕국의 중심지 였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왕권 다툼에서 장보고는 838년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 (김우징)을 옹립하고 딸을 왕에게 시집 보내 외척으로 정권을 잡았는데, 신무왕이 죽고 그 태자 문성왕이 즉위하자, 이번에도 딸을 왕에게 시집 보내려다, 신라 귀족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룩하지 못 하였고, 그 후  그 부하장수 염장에 의해 문성왕 8년 (846년)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 후 장보고를 따르던 부하 장수들에 의한 반감이 지속되자, 문성왕 13년 (853년) 신라 왕실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급기야 완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벽골군 (전북 김제시)에 강제 이주시켜, 그 섬을 空島 (공도)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한편, 완도의 수난은 이때 뿐 아니었다.
고려 조에 이르러 징기스칸의 후예 몽고 원나라가 침입하여, 고려 고종과 원종은 강화로 천도 후, 그곳에서 40여년에 걸쳐 항쟁을 한다.
그런데, 원종에 이르러 원과 강화 교섭을 하고자 하는데,
고려 무인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던 삼별초 군대가 몽고와의 강화는 있을 수 없는 일 이다며, 삼별초는 1271년 배중손을 중심으로 인천 강화도에서 전라남도 진도로 군영을 옮기고, 고려 왕족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 관군과 몽고 군대에 저항운동을 펼치게 된다. 위 삼별초의 군대가 경남 창원과 전북 전주까지 진군을 하였다고 하니,  삼별초의 군세가 초기에 얼마다 대단했는지 알수 있다.
그런데, 여몽 연합군대의 대대적인 정벌로 1272년 진도전투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승화후 왕온이 참수 당하며, 삼별초 군대는 김통정을 중심으로 제주로 옮겨가는데,
원종 14년 4월 (1273년) 제주도 마저 여몽 연합군대에 함락되어, 삼별초는 완전히 해체된다.
 
이후 원종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의 섬에 대하여 空島 정책을 펼쳐, 섬에있는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강제이주 시킨다.
즉 완도는 신라 문성왕 때 空島가 되고, 1273년 고려 원종 때에도 다시 한 차례 섬 주민들이 육지로 강제 이주된 것이다.
 
그 후 78년이 지난 고려 공민왕 원년 (1351년) 에 이르러 해금령이 반포되어, 다시 완도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의 섬에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때 남해안 섬에 주민을 거주시킨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 때문 이었다.
공민왕 시절이 되면, 원의 세력이 점차 기울어 공민왕은 고려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방정책에 힘을 기울일 때이다.
그러다 보니 원의 국경과 먼곳의 남해안 일대는 국방을 등한시 하였는데, 이를 기회로 왜구가 침략한 것이다. 그 당시 왜구의 침략이 전북 부안, 전주까지 이르렀다니, 고려 조정에서도 골치 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空島 정책에 의해 비워둔 남해안 일대의 섬은 자칫 왜구가 한반도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 거점이 될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은 왜구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남해안 일대의 섬에 해금령을 내려 다시 주민들이 거주토록 하고, 왜구를 토벌하는 본진으로 삼은 것이다.
이때, 한반도 남부에 침략한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분들이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다.
지금도 남해안의 섬에 가면 최영 장군이 섬에 머물며 섬 주민들에게 그물짜는 방법을 가르키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전설이 내려와 최영 장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당제가 있다.
한편, 고려사와 용비어천가에 보면 이성계 장군의 왜구 토벌 공로가 여럿 보인다.
 
송징 장군이 과연 대몽항쟁을 위해 당시 완도에 머물렀던 삼별초의 장군 이었을까?
완도는 신라 원성왕때 1차 空島 정책이 발령하여, 섬의 주민들이 육지로 강제 이주 되었고,
고려 원종 때  2차 空島 정책이 발령하여, 섬의 주민들이 육지로 강제 이주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도 많았을 것이다.
 
한편, 삼별초의 거점은 완도가 아니었다. 거리는 가깝지만 진도가 중심 거점 이었다.
삼별초가 강화에서 철군 후 남하하여 남해안 일대에 정착 후, 제주도로 옮겼는데,
강화에서 제주로 향하자면 남해안의 진도가 직선 거리이며, 완도는 한참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고려사에도 삼별초의 거점은 진도 였다.
 
그런데, 불과 100년전 무렵 항일 운동 애국지사 소남 김영현 선생의 청해비사에 의해 삼별초의 중심이 진도에서 완도로 옮겨졌고, 한편 완도에 오랫 동안 전설로 내려오던 송징 장군이 삼별초 장군으로 정설화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송징 장군이 삼별초의 장군 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적다.
이유는 1273년 여몽 관군에 의해 삼별초 군대가 진압된 후, 고려 조정은 남해안 일대 섬에 대하여 空島 정책을 내리고, 섬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이주 시켜 오랫 동안 섬을 비워뒀기 때문이다.
 
그 후 78년만에 해금령이 반포되어 다시 섬에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나,
78년 이란  2세대가 바뀌는 세월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며,
한편 삼별초 진압 후 78년이 흘러 새로운 주민들이 이주 되었는데, 새로 이주한 주민들이 문헌에도 없는 송징 장군을 기억하고 제향을 1,000년 가깝게 모셨다는 것은 좀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을 준다. 그리고 거리는 서로 가깝지만 삼별초의 주요 거점은 진도였다. 
 
송징 장군에 대한 문헌이 없어, 정확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에 송징 장군은 삼별초가 아니었다.
아마도, 공민왕 시절 해금령에 의해 완도, 진도 등 남해안 일대의 섬에 주민들의 거주가 다시 시작 되고,  최영과 이성계 장군에 의한 왜구 토벌이 왕성할 무렵, 남해안 완도 일대에서 주민들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섬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장군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말 공민왕 시절 왜구를 토벌한 최영 장군은 지금도 남해안 일대 섬의 주신이다.
그렇다면 송징 장군도 대몽항쟁의 삼별초 보다는 왜구를 토벌한 장군이 아니었을까.
 
우리 진천송씨 족보에는
고려 말  찬성사공 諱 지백 조부께서 4명의 아들을 두셨는데,
장남이 宋徵 이시다.
우리 족보에 위 분의 벼슬이 府使로 전하는데, 이 분의 자손이 없다보니, 그 내력이 자세히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참고 : http://cafe.naver.com/dydwn1018/567
 
        http://100.naver.com/100.nhn?docid=86311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974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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