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전설- 宋徵 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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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전설- 宋徵 대장군

송은도 0 4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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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  (전라남도 무형문화제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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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좌리는 정월 보름에 당제를 지내는데 제를 지내는 곳은 장도라는 섬과 마을 안 사장나무 거리이다. 장도의 당은 섬 가운데 위치한 당집인데, 당집을 둘러싸고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당집은 마을을 둥지고 바다를 향해 동향으로 세워졌다. 그 안에는 주신 송징 (宋徵) 장군과 우측에 정년 (鄭年) 장군, 죄측에 혜일 (惠日) 대사가 모셔져 왔으나 1982년부터 장보고 장군을 모시고 있다. 당제를 위해서 정월 초사흘에 마을 회의를 열어 제관, 제비, 굿칠 사람을 선정하고 제사를 정월보름에 지낸다.
 
 
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한 완도에는 신라시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가 해마다 진행되고 있다.
장보고 (張保皐)는 (생년 미상- 846년 卒) 신라 무장으로 본명은 궁복 (弓福), 궁파 (弓巴)이며, 위 이름은 '활을 잘 쏘는 사람' 이라는 뜻 이다. 그는 젊어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무과에 급제하고, 당나라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무령군소장 벼슬을 지냈다.
그런데,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모습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흥덕왕 3년 (828년) 신라에 귀국한 후,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아 1만의 군사로 청해 (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완전히 소탕했고 전한다.
장보고의 일대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화려했다.
단순히 청해진에서 해적을 소탕한 것 만 아니고, 한반도-일본열도-중국대륙-아랍을 연결하는 대해상 무역로을 개척하여 동아시아의 대교역 바닷 길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은 비단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중동의 아랍권에도 보이며, 속일본기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속일본기에 보이는 그의 이름은 張寶高 인데, 이름이 보배 보, 높을 고 이다.
(옛날에는 오늘 날 처럼 한자에 뜻을 두고 이름을 짓지 않았다. 즉 옛 사람들의 한자표기명은 이두식 표기 법으로 음에 맞추워 알맞는 한자를 썻다. 그러다 보니 같은 사람 인데도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경우가 많다)
寶高의 뜻을 풀이하면 '보배 중의 최고' 이다.
한편 오늘 날에도 일본 궁내청 (왕실) 창고에는 장보고가 일본에 교역한 물품이 지금도 보관되고 있으며, 속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일본 천황이 장보고의 교역물품을 적극 수용하되, 다만 가산을 탕진하지 않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즉, 장보고 교역품은 당대 최고의 물건으로 일본 내에서 귀족들 사이에 호가에 매매 되어, 일부는 그 물품을 구입하느라 가산까지 탕진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 였다.
한편, 일본에는 장보고와 거래를 하여 막대한 부를 누린 관료가 있었는데, 그가 훈야노미 야타마로 (文室宮田麻呂) 이다. 그는 신라에서 장보고가 암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 부하들이 가져온 교역품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장보고에게 거액의 선금을 투자 하였는데, 장보고가 죽었으니, 물품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물품을 압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일본 천황이 이는 물품을 탈취한 것으로 보고 다시 장보고 측근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속일본기에 보인다.
 
아무튼, 장보고는 그 당시 우리 신라 뿐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 중국, 아랍권까지 그 이름을 떨친 위대한 장군이요, 역사상 유례없는 최대 교역상인 임을 알수 있다.
그런 장보고가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그 비중이 상당히 적다.
그러다 보니 오늘 날 중국에서는 장보고가 본래 신라 사람이 아니고, 중국 사람 이라고까지 우길 정도이다.
이 위대한 인물 장보고가 우리 역사에서 야박했던 이유는
838년 (희강왕 3년)에 장보고는 왕권 경쟁에서 밀린 김우징을 완도로 불러온 후, 왕권다툼에서 희강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 (우징)을 옹립 하였다. 그리고 신무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 신라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한편 신무왕 사후 태자 문성왕이 즉위 하였는데, 이번에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에게 시집 보내고자 하였다.그런데 그 권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귀족들이 그 혼인을 반대 하였고, 결국 염장으로 하여 장보고를 암살토록 하였다.
즉, 장보고의 말년 인생은 비참 하였고, 한편 왕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인물 이라는 오명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 유학자 김부식의 눈에는 그 장보고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본론으로,
오늘 날에도 전남 완도에서는 해마다 장보고 제향을 올린다.
그렇다면, 장보고가 849년에 卒 하였으니, 그 제향 행사가 1150년 동안 지속 되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사실 장보고 제향은 불과 30년쯤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전 완도에서는 송징을 주신으로 하고, 정년과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향이 있어다 한다.
여기에서 정년은 장보고의 친구이다. 정년은 젊은시절 장보고와 함께 당에 건너가 무과에 급제하고, 무장으로 활약 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벼슬길이 막혀 한 동안 당에서 비참한 생활을 였고, 먼저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출세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 또한 신라로 건너와 장보고에 의탁 하던 중, 훗날 장보고를 도와 민애왕을 쫓아내고 신무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렇듯 장보고의 친구 정년은 완도의 신으로 그 동안 모셔왔는데, 장보고는 역적의 오명 때문인지 비교적 근래에 그 이름이 빛나기 시작하는데,
 
현재 완도의 제향은 본래 장보고가 아니었고,
송징 대장군을 주신으로, 정년과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향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故 김대중 정부 시절 청해진 복원 발굴 사업이 진행되며, 사당의 신주를 장보고로 바꾸고, 송징이란 이름은 뒤안길로 사라진 채, 그 자리를 장보고로 대체 한 것이다.
 
 
지금도 완도에 가면 연세 지긋한 어른신들이... "원래는 이 제향의 주신은 장보고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라며 과거를 희상하는 분들이 계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완도 제향의 주신 송징을 살펴보자.
완도 주민들과 조선시대 추모시에 의하면 송징은 대장군 이었다.
그런데, 위 분에 대한 기록이 없다보니, 위 분이 정확히 대장군 인지, 아니면  지방관 인지, 더욱이 어느 시대에 살다가신 분인지 조차 모른다.
즉, 오랫 동안 구전으로 그 분의 존함과 업적만이 전래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년이 장보고의 친구 였으니, 과연 송징 대장군도 장보고의 친구 였을까?
그렇지 않다.
 
잠시 인터넷에서 宋徵을 검색해 보았다.
조선 중엽 (1564-1643년)을 살다간 문관이 한 분 있다. 위 분이 정철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충숙공 諱 영구 조부님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신 분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 분은 본관이 신평송씨 이시다.
그렇다면 신평송씨 이분이 과연 완도의 주신 이었을까?
 
한편 우리 진천송씨 족보에도 宋徵 이라는 분이 계신다.
송정공 증손자 목사공 諱 징이 있다.
생원공 諱 옥 조부가 송정공파 도사공 익산문중의 낙향조 이신데,
생원공의 친형님 되시는 분이다.
위 목사공은 진천송씨 송정공파에서 2번째로 대과에 급제하신 분인데,
조선실록에도 그 행적이 잠시 보이며 여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위 분은 아들이 없어 그 대가 끊겼다.
그렇다면 송정공의 증손자 위 분이 관연 완도의 주신 이었을까?
 
그러나 모두 아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완도읍지에 송징은 고려 말 대장군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 말 대장군 이라고 하면, 혹시 송문주 장군 처럼 원나라 몽골에 대항하신 분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 이미 원나라는 쇠퇴하여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다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내몽골 지역에서 거주하게 되는데,
이 무렵 고려 공민왕은 원에 빼앗긴 고려의 주권과 영토를 회복하고자,
최영, 이성계 장군들로 하여금, 자비령 (철령) 이북을 점령케 하는 등 북진정책에 주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몽골과 거리가 먼 남해안 일대는 좀 등안시 하였는데,
이때 왜구 무리가 자주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를 노략질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남해안의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고 방허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송징 대장군은 이 무렵 남해안 수문장으로, 청해진 (전남 완도)에 파견되어 그 지역 주민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 부터 칭송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공로로 오랫동안 완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 신으로 추앙되어 제향을 모셨을 것이다.
 
얼마전 어느 대학 교수가 청해진 (완도) 주신 宋徵 장군을 고찰하기 위해,
고려사를 찾아 보았는데, 고려사에 그 행적이 보이지 않아,
전국 각 송씨 집안의 족보를 뒤졌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진천송씨 족보에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 살다가신 府使 宋徵을 발견하신 것이다.
이로써 그 교수는 혹시 이분이 완도의 주신이 아닌가 했는데,
위 분의 대가 끊어져, 그 내력의 전함이 없고, 더욱이 우리 진천송씨 족보도 위분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다 보니, 송징 장군을 연구한 대학교수는 완도의 주신이 진천송씨 부사 송징이 아닐까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라고 결론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진천백 諱 仁 시조님의 5代孫 (래손) 찬성사공 諱 지백 조부는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徵, 소(王+召), 琳, 무 (王+懋) 이시다.
 
평리공 諱 소 조부께서 전서공, 낭장공, 안성공 3명의 아들을 두시고,
서령공 諱 림 조부께서 송정공 외아들을 두셨는데,
송정공께서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한 사실이 고려문과방목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왕의 선왕이 공민왕 이고,
부사공 諱 징은 송정공의 백부 되시니,
우리 진천송씨 족보의 부사공은 공민왕 시절에 활동하신 분으로,
완도읍지에 보이는 고려말 대장군과 일치하신다.

한편 송정공은 우리 족보와 조선실록에 존함이 愚 (어리다 우) 인데,
고려 문과 방목에는 遇 (만날 우)로 되어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고려문과 방목에 松停이라 쓰고, 그 아래 鎭州人 (본관 진천)이라 기록하여,
위 분이 진천송씨 송정공 조부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송정공이 고려 우왕 3년에 급제를 하였다고 하니,
큰 아버지 되지는 송징 장군은 고려 말 사람이 맞다. 
예전에 내가 우리 진송카페에 송정공의 존함을 遇로 올렸다가, 대종회의 어느 어르신들이 대종회 홈페이지에 조상님 이름을 잘못을 썻다며 호통을 한적이 있는데, 그 때 본인은 고려문과 방목에서 그 존함을 올리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1200년 동안 전남 완도를 지켜오신 남해의 주신 宋徵 대장군.
위 분이 우리 진천송씨 찬성사공 諱 지백 조부님의 장남이시다.
그런데, 위 분의 자손이 없고, 한편 우리 족보가 이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흘러 만들어지다 보니, 그 존함만 전하고, 살아 생전 공로는 잃어버린 것 이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우리 조상님들을 잊고 살아가니...
세상의 인심도 그 분을 잊어 버렸다.
 
1200년 동안 완도의 주신으로 남해를 지켜오신 宋徵 장군,  우리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그 분의 이름이 차츰 잊혀져 가고,
이젠, 신라 명장 장보고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안성의 죽주산성 송문주 장군만 우리 진천송씨의 조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는
송징 대장군 또한 우리 진천송씨 조상 이시다.
 
아직 완도에는 송징 장군을 기억하고 계신 지역 원로 어르신들이 있다.

이분들이 세상을 떠나 송징 장군이 완도 주민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기전,
우리 진천송씨 후손들은 완도에 찾아가,,,
송징 장군의 사당을 다시 세우고, 위 분의 제향을 다시 모시도록 해야할 것 이다
 
여기 이분에 대한 시가 오랜 세월 전하였으나,
이제 그 맥이 막혀, 이 노래를 더 이상 읊는이가 없고,
기억 너머로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송대장군,
힘은 산을...기개는 천지를 휩쓸어...
두 눈이 왕방울 같은데 수염은 빗자루 달아맸나. 
위로 손을 뻗으면 달 속의 토끼 붙잡고,
흰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 묶으리라.
허리에 찬 굳센 화살 굵기가 나무둥치
칼집에 든 큰 칼은 북두칠성 찌르겠네.
활을 당기면 화살은 육십 리 밖을 백 보 거리처럼 날고
활촉은 높다란 벼랑에 헌 짚신 꿰듯 박히더라네.
 
(전남 완도에 전하는 송징 대장군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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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호국신사(護國神祠) : 현의 남쪽 칠장리(七長里)에 있다. 세상에서 ‘모시는 신은 송징이다’라고 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도 송징이 주신이었음을 알려준다.

1885년에 편찬된 <호남진지(湖南鎭志)>에는 송징을 ‘고려말’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장도단(將島壇)과 관련하여, ‘고려장사’ 송징이 청해 장도에서 무술을 닦았는데, 지략과 무용을 겸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장도의 토성도 고려 장사 송징이 쌓은 성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 사람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몽골과 항전을 벌인 삼별초의 장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조선 후기<씨족원류 진천송씨조>와 <진천송씨족보> 고려 말 사람으로 송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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