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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도 0 4099

도사공 춘천문중 사암종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실 공사 준비가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고, 저는 비록 춘천문중은 아니나,
도사공 후손으로 한 없는 기쁨을 느끼며 춘천 사암 종인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제실 명으로 참고하고자 도사공 할아버지 字 또는 號를 물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도사공 할아버지의 字 號를 아시는 분은 없을 듯 합니다.
 
이미 족보를 찾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족보에 없으니 이곳에 물으셨겠지요
그런데, 도사공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보니.. 그 분의 字 號가 지금까지 전해 올 일은 없습니다.
 
도사공 할아버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전북 익산시 왕궁면 흥암리 후암마을의 옛 선산에 모셔진
도사공 단비가 유일 한데요. 이 단비도 불과 1945년에 세웠습니다.
비문을 보면 도사공 할아버지의 조상에 계보가 쓰여있고, 형제분의 나열되어 있으며, 벼슬이나 관직이 쓰여있을 뿐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즉 족보에서 확인되는 부분만 세겨 놓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편 위 분의 형님 부사공 諱 목, 아우 판결사공 諱 취  방조님의 경우 조선실록에도 그 행적이 보이고,
더욱이 우리 집안 1673년 계축보, 1799년 기미보, 1859년 후기미보가 모두 판결사공의 후손들에 의해 쓰여졌음에도 판결사공의 字 號 마저도 알수 없었는지 족보에 기록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즉... 위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후에 족보가 쓰여지다 보니, 이미 오래 전부터 후손 중 字 號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저의 의견을 드립니다
제실 명을 어떤 이름으로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춘천 사암 종인 여러분의 몫이라..
제가 이런 의견을 드린다는 것이 좀 석연치 않게 보일 수 있으나,
 
저의 생각에 제실 명으로 도사공을 유추할 수 있는 이름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그 제실은 춘천문중 사암종원 분들이 건립하는 제실 입니다.
물론 현재 춘천 사암종중에서 도사공 이하 3대조의 단비를 모시고 있으나,,,그렇다고 제실 이름을 도사공 제실로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어떻게 보면 춘천 사암 종중에 큰 부담을 줄수 있습니다.
지금 세대는 익산문중, 춘천문중, 용인문중이 무엇인지
그리고, 본래 익산문중에 있는 단비를 춘천문중에서 새로 모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 당장은 큰 문제가 없으나,
 
지금 세대가 죽고 현손자, 래손자, 잉손자, 곤손자, 운손자까지 내려가면...
이 세대들은 이런 사실들을 까마득하게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그때가서 제실명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즉, 만법동에 도사공 단비가 모셔져 있고, 그 아래 제실 이름도 <가칭 도사재> 이다면...
그 땅은 본래 익산, 춘천, 용인문중의 공동 재산이 아니냐라는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실 명을 <가칭 도사재>라고 하는 것은 참 위험을 무릎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춘천문중의 분파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춘천 문중의 분파가  단독 이라면...
춘천 낙향조 諱 미 조부님의  존함으로 정하는 것이 <가칭 도사제> 보다는 안전할 것으로 보이고요.
 
만약 낙향조 諱 미 조부님 이하로 2개 이상 분파가 있는데,
그 중 1개 분파만 제실 건립에 참여 했다면,
제실 건립에 참여한 분파의 파종조의 존함으로 제실 명을 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이다 생각 합니다.
 
한편 과거에는 지역명으로 종중 명을 정하거나 제실 명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지명으로 종중 명이나 제실 명을 정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과거에는 집성촌이라 하여,,, 특정 지역에  성씨의 분파들이 집단 촌락을 형성해 살았기 때문에,
분파의 구별이 쉬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토박이 들이 타향으로 떠나고, 오히려 외지인들이 새로 전입하여 들어오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데, 사암 종중 또는 사암재 이런 식으로 이름을 정하면...
먼 친척이 그 동네에 새로 전입하여 오랫 동안 머물 경우 구별이 되지 않아..
후손들 사이에 재산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춘천 문중의 분파를 잘 몰라 가칭으로 설명 합니다)
만법종중과 사암종중이 있다고 할때...
조상대대로 오랫동안 만법종중은 만법리에 살았고, 사암종중은 사암리에 살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제실 건립에 만법종중은 참여하지 않고, 사암종중만 참여 했습니다.
그런데 재실이 사암리 위치하여 <가칭 사암재>라고 할 경우 지금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먼 훗날 200-300년 이후 만법종중 후손 중 사암종중에 이사하여 뿌리를 내리고, 반대로 사암종중의 후손들은 본향을 떠나 그 수세가 적어지면...
만법종중과 사암종중이 구별되지 않아... 재산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도사공 익산문중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익산문중의 경우 도사공 손자 생원공 諱 옥 조부가 전주 장암으로 낙향하여 익산쪽에 그 후손들이 터전을 잡았는데요.
생원공 손자 학생공 諱 경운 조부께서 2명의 아들을 두십니다.
큰 아들 학생공 諱 의 ====> 익산시 왕궁면 흥암리 후암마을 (일명 왕궁종중)
작은 아들 생원공 諱 실 ====> 익산시 팔봉면 쌍릉 인근 (일명 팔봉종중)
 
그런데,,, 세월이 흘러,,, 팔봉종중 후손 중 일부가 왕궁종중 후암마을로 이사하여 세거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25년전,,, 왕궁종중 후암마을 뒷산 (명덕산)이 왕궁종중의 단독 재산이냐.. 아니면 팔봉종중과 공동재산이냐를 두고 대판 싸움이 벌어진 사실이 있습니다.
 
묘지 위치를 보더라도 이미 조선 중엽 (대략 1600년) 부터 도사공 익산문중은 왕궁종중과 팔봉종중으로 나뉘어 재산이 분할 되어 있었고,,, 서로 재산을 달리 하였는데...
팔봉종중 후손들이 왕궁종중 본토에 일부 세거하다 보니... 그 구분이 모호해져... 이런 분쟁이 생기게 되었지요...  물론 결과는 팔봉종중에서 수긍을 하여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결론을 내릴 때까지 상당히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부에서는 큰 집이 작은 집 쫓아내고 재산 가로채갔다고 수근수근 합니다...
 
저는 본래 팔봉종중이 생가이나 증조부가 큰 댁 왕궁종중으로 양자를 오셔서 지금은 왕궁종원이 되었는데요...
그래서 저희 부친의 경우 왕궁종중 사람들 보나 팔봉종중 사람들과 가까웠고, 친분 있는 사람들이 그쪽에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때.. 25년전 있었던 재산 다툼은 팔봉종중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입니다.
후암마을 뒷산 (명덕산)은 공동재산이 아니라 왕궁종중 단독 재산이 맞습니다.
 
대략 무슨 내용인지 이해 하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제실 건립을 축하드리며,
제실 명은 지역명 이나 또는 도사공 할아버지 이름으로 정하지 말고,
춘천문중의 분파종까지 고려하여 정하셨으면 하는 의견이며,
 
제실이 완공 될때까지 아무 사고없이 잘 진행되고,
춘천문중의 계속적인 발전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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