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공 할아버지 집터와 묘소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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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공 할아버지 집터와 묘소실전

송은도 0 4680
 
송우 (宋愚)
생년 미상-1422년 (세종4) 卒 진천백의 7代孫이며,
고려말 조선 초기 문신으로 字는 汝省 (여성) 呼는 松亭 (송정)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90년 (공양왕 2) 지평을 거쳐 지성주군사 우헌납이 되었다.
1391년 3월에 귀양 갔다가 11월에 풀려났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집의를 거쳐 1402년(태종2) 평양도찰방이 되었다. 1406년 좌사간을 지내고 이어 예조참의가 되어 판정주목사 판안변부사를 지냈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인용하여 보았습니다.
우리 진천송씨는 전서공, 낭장공, 안성공, 송정공, 참의공 5개파로 분류가 되는데, 그 중 송정공 파조를 제외한 나머지 파종조는 기록이 없어 아쉬움이 많다.
 
송정공은 조선실록에 그 존함이 여러차례 보이는데, 훗날 가선대부 종2품에 이르렀다.
고려시대는 5품이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없이 관직에 등용하는 문음제도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음서제도가 있었다. 다만 고려시대 보다 규모를 줄여서 2품이상 고관의 자제는 과거없이 관직에 등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정공의 아드님과 손자들이 정말 벼슬에 올랐는지 확인해 보았다.
송정공은 전의이씨 부인에게서 2남3녀를 두어 부사공 諱 목, 도사공 諱 익을 두셨다
그리고 결성장씨 부인에게서 3남을 두어 판결사공 諱 취, 군수공 諱 학, 諱 휘를 두셨다.
즉 5명의 아들을 두셨는데, 위 아들 5분이 모두 벼슬에 오르셨는지,우리 족보에 과거 급제한 내용은 없으나, 모두 관직 명이 쓰여있다. 즉, 음서에 의해 관직을 받으신 것이다.
 
현재는 도사공 익산문중이 송정공 집안의 장손 집안 이지만,
본래 형님 부사공이 계셨다. 그러나 훗날 부사공 집안의 자손이 끊어졌다.
잠시 그 계보를 보면
송정공 - 부사공 - 諱 번 - 諱 광실 - 諱 신종 - 諱 맥석 - 諱 승은 - 諱 후송 이렇게 된다. 송정공은 7代孫 (잉손)에 이르러 장손의 대가 끊어지고,
장손이 도사공 집안으로 승계된 것이다.
 
조선실록에 송정공 5분의 아들 중 그 존함이 보이는 분이 있다.
첫재 아들 부사공 諱 목, 세째 아들 판결사공 諱 취께서 여러차례 보인다. 큰 아들은 좌랑을 거쳐 남양부사, 양양부사를 지내셨다.
한편 우리 진천송씨 조선시대 조상님 중, 조선실록에 가장 많이 기록된 분이 판결사공 이시다.
둘째아들 도사공은 조선실록에 그 존함이 보이지 않는다.
 
도사공은  첨지공 諱 의, 생원공 諱 상  아들 2명을 낳으시고,
판결사공은 교하공 諱 선충, 찬성공 諱 선효, 참봉공 諱 선문  3명의 아들을 낳으신다.
 
생원공 諱 상과 참봉공 諱 선문께서는 문음 혜택을 받지 못 하였다.
그 형들은 모두 문음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올랐는데,,,
위 두분은 관직을 받지 못 하였는지, 과거에 응시 하였다.
그런데 생원공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는 합격하지 못 하였고,
참봉공 역시 7차례 과거에 응시 하였으나 모두 낙방하여 처사로 사시다, 훗날 소격서 참봉이 되셨다.
 
조선실록을 볼 때... 송정공의 손자 세대에서 조상덕을 가장 많이 본 분은 첨지공 이시다. 그리고 조선실록에 첨지공과 교하공께서는 여러차례 그 존함이 보인다.
 
그런데, 첨지공과 교하공의 관직 생활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세조 8년 (1462) 첨지공께서 악학도감사로 재직 하였는데, 이때 왕실에서 관리하는 女妓 (여자기생)를 상부허락 없이, 지인들에게 빌려주어 41명의 관료들이 여자 기생과 함께 술판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들통나 사간원에서 그 죄를 임금에 고하며 곤장 80대씩 벌 할것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위 자리에는 교하공께서도 함께 있었다. 당시 교하공의 벼슬은 별좌 이었다. 첨지공과 교하공은 내종사촌 이다... 친사촌 인데, 모두 곤장 80대씩 벌받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물론, 위 사건은 세조가 4명만 곤장 40대 벌하고, 나머지는 용서하여 첨지공과 교하공께서는 무사히 위기를 넘기셨다.
 
이후 첨지공과 교하공의 운명은 서로 상반된 길을 걷게된다.
조선실록을 보면 첨지공은 벼슬이 여러차례 오르신다. 공무를 잘 처리하여 벼슬을 올리는 등, 훗날 첨지중추부사 정3품까지 이른다. 첨지중추부사 이면 비록 무관 벼슬이나 당상관 이상에 해당한다. 그 부인은 숙부인의 칭호를 받으며, 당상관 이상은 국가 정책 집행 뿐 아니라 결정에도 참여하는 고관이다.
또한 첨지공의 장인이 전의이씨 인데, 한성부윤을 지낸 이사관 (李士寬) 이시다.
한마디로 첨지공 께서는 조상 덕을 타고난 분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정2품 가선대부 이고,  장인은 한성부윤을 지낸 분이시니,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올랐지만 정3품 당상관 이상까지 벼슬에 오른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에 음서로 영의정, 판서까지 오른 분이 여러명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비중이 적으며, 조선시대는 당상관 이상 벼슬을 하려면 최소 대과에 급제 하여야 했다. 그런데, 첨지공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당상관에 올랐으니 조상덕을 가장 많이 본 분이라 할수 있다.
 
한편, 교하공은 세조 임금시절 왕세자비 채택문제로 귀수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교하공께서 딸이 없다고 숨겼다가 들통이난 모양이다.
이일로 영의정 강맹경이 임금에게 청하기를 법에 따라 천인으로 속하게 하고, 그 아비까지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그 죄를 늦게까지 추문하지 않은 사헌부까지 모두 죄를 물어야 한다고 청한다.
 
그런데, 이 일은 세조 임금이 아량을 베풀어  송선충, 허삼 등이 자수 하였는데, 죄를 묻는다면 앞으로 누가 자수를 하겠느냐며. 더 이상 죄를 논하지 말라 하여 다행히 넘어간다.
 
그후 성종8년 교하공께서는 자진하여 벼슬에서 퇴진하고자 하나... 성종이 이를 만류한다.
한편, 성종10년 (1479)에 성종 임금이 행차하는데, 교하공께서 수행 하였다. 그런데 날씨가 좋지않아 안개가 짙고 바람이 몹시 부니... 수행 병사들이 지척을 분간하지 못 하고, 혼미하여 길을 잃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일이 생겼다.
이에 성종 임금이 크게 노하였다, 수행 책임자 용인 현령, 교하 현감, 연천 현감에게 곤장100대를 벌하고, 모두 변방으로 내쫓는 일이 생겼다.
조선실록을 보면 교하현감에 조호지를 임명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 이후 교하공의 존함은 조선실록에서 보이질 않는다. 즉, 교하공의 벼슬은 막힌 것이다.
아무튼 교하공께서는 그렇게 순탄한 벼슬 생활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송정공 집안은 손자까지 문음으로 출세하여서 인지, 과거 급제자가 다른 집안에 비교하여 늦게 나왔다.
 
첨지공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 아들 군수공 諱 계께서 문과에 급제 하셨다. 이분이 도사공 춘천문중의 직계 조상 되시며, 송정공파에서는 최초 문과 급제자 이시다.
 
송정공파의 두번째 급제자 또한 도사공 집안에서 나왔다.
첨지공의 둘째 아들이 생원공 諱 찬 이신데, 그분의 큰아들 부사공 諱 징이 과거에 급제 하였다. 송정공의 현손자 되신다. 
 
첨지공은 아들과 손자에서 과거 급제자가 나온 것이다.
이분처럼 복 많은 분도 없을 것이다. 
 
송정공파의 세번째 급제자는  판결사공 諱 취 증손자 이며, 찬성공 諱 선효 손자 되시는 서교공 諱 찬 이다. 송정공의 현손자 이시다.
1541년 신축보를 창보 하신 분이다. 위 신축보는 현재 전래되지 않는다.
 
위 처럼 송정공은 본인이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고, 그 공로로 5명의 아들이 모두 문음으로 벼슬에 올랐으며, 또한 그 손자들도 문음으로 벼슬에 올라 특히 첨지공의 경우 정3품 당상관까지 올랐고,
증손자에서 군수공 諱 계가 과거에 급제하고
현손자에서 부사공 諱 징, 서교공 諱 찬이 과거에 급제하는 등...
조선 초기 명문중의 명문 이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위 명문 집안이 어째서 송정공의 산소를 잃어버렸는지 이해 할수 없다.
산소를 잃어버린 것은 불과 최근도 아니다.
1673년에 우곡공 諱 창께서 계축보를 창보하셨는데, 이미 1673년 이때부터 송정공의 산소 위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송정공의 산소를 잃어버리게 된 배경을 곰곰히 살펴 보았다.
물론 송정공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500년의 세월이 흘러, 그것을 정확히 진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집안 족보와 다른 집안의 문집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 추리는 할수 있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다
 
송정공 묘소를 잃어버린 첫번째 이유는
송정공의 큰 아들 부사공 집안이 일찍부터 자손이 끊어졌는데, 차라리 일찍 끊어졌으면 둘째 집안에서 당연히 묘소를 관리했을 텐데...송정공의 7대손 (잉손)에 이르러 자손이 끊어졌다. 그 사이 작은 집들이 전국 지방으로 낙향한 것이다
물론 위 경우 양자를 가야하는데, 통상 장손 집안이 작은 집 보다 자손이 빨리 번창하여, 항렬이 늦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장손 집안이 만약 대가 끊기면... 맞는 항렬이 없어 양자를 얻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양자가 있었으나 훗날 파양하고 본가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양자를 파계하고 본가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군수공 諱 면, 회양공 諱 반에서 알수있다. 우리 족보는위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으나, 나중에 조선실록에서 확인됬어는데, 군수공은 아들이 없어, 회양공을 양자로 삼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훗날 파양하고 본가로 돌아갔는지, 우리 족보에는 양자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한편, 송정공 집안은 본래 서울 경기 양주 일대에 거주하였으나, 전북 익산, 완주, 강원 춘천, 경기 용인, 충남 공주 등으로 분가하여 지방으로 낙향 하였는데,
1500-1600년 사이 장손 집안의 대가 끊어진 것이다. 
 
두번째는 송정공 장손 집안의 대가 끊기고 작은 집 사이에 재산 분쟁이 있었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 사실은 꼭 장담 할수 만은 없는데... 한산이씨의 문집에서 짐작할 수 있다.
 
아계이상국연보 문집이 있는데, 이 책은 한산이씨 아계공 이산해의 문집이다.
이산해는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이다.
그런데, 아계이상국연보 문집에 송정공 할아버지의 저택이 잠시 소개되어 있다는데, 얼마전 한자도 모르는 이 무식쟁이가 우연치 않게 그 부분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보게 되었다.
아계공의 아버지가 성암공 이지번 이라고 한다. 성암공은 학문, 천문, 지리, 역술에 능하여 특히 점술을 잘 보았다. 그래서 성암공이 점지해 준 묘자리 관련 전설은 지금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암공의 아우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선생 이시다.
 
그런데, 송정공 할아버지의 집터가 명당이긴 명당 이었나 보다.
성암공 이지번 선생이 송정공의 저택은 道峯(도봉산)과 文筆峯(서울 남산)이 공조하여 奇才(기재)가 태어날 형국이라 하며 그 집터를 매입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토정 이지함 선생은 酉년(유년)과 戌年(술년)에 반드시 기재를 지닌 자손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장담하였다는데, 1538년 무술년에 아계공 이산해 선생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계공 선생은 우리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선조시대 8대 명문장가 중에 한분으로, 이미 2-3세 무렵에 글을 깨치기 시작하여, 숙부 토정 선생에게 글을 배웠으며, 훗날 과거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오르신 분으로, 부친과 숙부의 영향으로 학문이 아주 높은 분이다.
그런데 이분이 북인정권 사람이다... 이후 정권은 남인과 서인쪽으로 기울어 졌다. 즉, 몰락한 패당 인물이다 보니 그 분에 대한 평가가 야속해졌다. 그래서 그 능력에 비하여 오늘 날 명성이 없는 것이다.
한산이씨 아계공 선생의 개인문집 아계이상국연보에 의하여 송정공 할아버지 저택을 아계공의 부친 성암공 이지번 선생이 매입한 사실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아계공 선생은 1538년-1609년을 사셨고,
그 부친 성암공 선생은 생년 미상이나 1575년에 사망했다.
즉, 성암공 선생은 대략 1500년 전후에 태어나 1575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수있다.
 
그런데, 위 무렵이면 송정공의 7대 장손 諱  후송의 자손이 끊어진 시기이다.
諱 후송께서는 생몰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우리 족보에서 이분과 같은 항렬의 친족들의 생년 연대로 추정할 수 있는데, 위 분과 같은 항렬들이 주로 1500년대에 출생 하셨다. 
그렇다면, 송정공의 장손 집안이 대가 끊기며 송정공의 재산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수있다.
 
장손이 아들이 없으면 당연히 작은 집에서 양자를 들여야 한다.
그런데, 장손 집안이 통상 작은 집보다 자손의 번창 속도가 빨라 항렬이 늦은 경우가 많다보니, 항렬이 맞지 않아 양자를 얻지 못 한는 경우도 있다.
한편, 송정공의 둘째 집안은 도사공 익산 문중에 해당하는데, 이 무렵 도사공 익산 문중은 모두 독자 이다...그래서 양자를 갈만한 분이 없었다. 자기 집안도 독자라 위태로운데 남의 집에 양자가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송정공의 장손 집안에 양자를 갈만한 분이 없어... 양자를 얻지 못했는지 모른다. 한편, 양자를 얻었으나. 그 양자가 훗날 파양하고 본가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만약 양자가 있었을 경우...
그 양자는 송정공 할아버지의 재산을 팔아먹은 것이다. 집을 팔았으니... 나머지 재산인들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위 경우 그 양자는 차남들로 부터 인심을 잃게되고, 차남들은 더 이상 그 양자와 발걸음 조차 하지 않게된다.

 
한편 양자가 없었을 경우...
이 무렵 도사공 익산 집안이 모두 독자이다 보니... 양자를 출가 시킬수 없었고,
그보다 더 작은 집은 항렬이 맞지 않아. 양자를 보낼 수 없어 양자를 얻지 못했을 있다.
 
그렇다면, 송정공의 장손은 도사공 익산문중에서 승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도사공 집안은 이미 전라도 익산으로 낙향 하였고,
한편,, 이 무렵 지방으로 낙향했던 송정공의 후손들이 다시 서울로 상경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방으로 낙향하지 않고 서울 근교에서 남아있던 집안도 있었다.
 
그렇다면 송정공 집안의 재산 다툼은 불보듯 뻔하다.
장손이 대를 잇지 못 하고. 자손이 끊어졌는데... 양자도 없다...
그런데, 장손을 잇어야할 집안은 이미 150년전에 지방으로 낙향하여 서울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서울 남아있는 후손들과  지방으로 내려간 후손들 사이에 재산 싸움은 분명히 발생하게 되었다.
이 재산은 뻔하다...서울에 남았던 사람들 입장에서 볼때 송정공 재산이 지방으로 낙향한 문중 손에 돌아갈 처지에 놓여있는데, 배가 아팠을 것이다.
못 먹을 바에는 차라리 본전이라도 건지자 라는 속샘이 불었는지 모른다.
 
물론, 위 추측은 근거가 너무 미약하다.. 따라서 믿거나 말거나 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 부터 명문 집안이고, 조선후기 까지 벼슬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인데,,,자신들의 파종조 산소를 잃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우리 족보에 1500년 무렵 장손 집안의 대가 끊어지고,  한산이씨 집안의 문집에서 1500년 무렵에 송정공의 저택이 팔렸다는 사실을 볼 때...
이 무렵 송정공의 장손 집안의 자손이 끊어지자, 자손들 사이에 재산 다툼이 있었고, 누군가에 의해 그 재산이 탕진된 것이다.
그리고 송정공의 묘소를 방치하게 되었고, 여러세대가 흘러 묘소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도 이런 현상을 도사공 익산문중에서 볼수 있다.
도사공 익산문중이  왕궁종중과 팔봉종중으로 나뉜다.
한편,,, 왕궁종중과 팔봉종중의 공통 조상으로 전북 완주군 비봉면에  생원공, 장사랑공, 학생공 3대조의 산소가 모셔져 있는데,
왕궁종중의 잘못으로 비봉면의 3대조 시제 답이 모조리 없어졌고, 더욱이 왕궁종중은 묘자리 까지 팔아 먹은 집안이 되었다.
 
한편 팔봉종중은 그런데로 종중 재산을 유지하여, 비봉면에 모셔진 3대조의 산소 정도는 관리할 수 있는 재력이 충분히 있다.
그런데, 왕궁종중이 말아먹었으니, 자신들은 상관 없다며 그 3대조의 산소를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여 산소를 소나무 밭속에 버려두었다.
 
비봉면의 3대조는 왕궁종중 뿐 아니라 팔봉종중의 직계 조상인데,,, 재산 다툼에서 왕궁종중에게 밀려 난 후, 왕궁종중이 그 재산을 탕진하자,,, 팔봉종중은 왕궁종중이 밉다며... 그 산소들을 방치하는 것이다.
 
종중 재산을 바라보는 눈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송정공 할아버지의 저택이 서울 중구 주자동에 위치 하였다고 한다.
한산이씨 성암공 이지번 선생이 그 저택을 구입하고 南山第 (남산제)라 불렀다고 하며,
주자동은 초선 초기부터 주전소 (인쇄와 화폐주조)가 위치하여 주자동 이라 하였는데,
서울 4대문 안에 위치하며, 종로의 종묘와도 거리가 가깝다.
즉, 조선시대에는 서울 시내 한 복판이나 다름없다.
현재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과 충무로역 중간 지점으로, 흥국생명 본점이 있으며 그 일대가 주자동 이다.
 
오랜 시간 장문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조선실록과 우리 족보를 뒤져가며 조상님 벼슬까지 소개 했습니다.
단순히 송정공파가 옛날에는 잘나가는 집안이고, 도사공파에 과거 급제한 조상 자랑하려고 올린 글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송정공 집안은 초창기 부터 거물급 이었는데,
어째서 송정공 할아버지의 산소를 잃어버렸는지 이해 할수 없더군요.
그런데..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얻었습니다. 바로 재산 다툼 이었습니다.
  
송정공 할아버지의 산소를 잃어버린 배경과 집터에 대하여 이야기 하다보니. 많이 길었습니다.
물론 위 추리가 꼭 맞다고 장담 할수 만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 족보와 한산이씨 문집을 놓고 몇 가지 가능성을 추리를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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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공 할아버지 집터>
서울 중구 주자동 일대에 송정공 할아버지 저택이 있었다.
주자동은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과 충무로역 사이 이다,,,
 
한산이씨 문집 아계이상국연보 (아계공 이산해 선생의 문집)에 의하면 성암공 이지번 선생이 송정공 집터를 매입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암공 선생은 1575년에 돌아가셨다.
한편, 송정공의 큰 집은 7代孫 諱 후송 이후로 자손이 끊어지고,
장손이 도사공 익산문중으로 승계되는데,,, 이때가 1500-1600년 사이이다.
즉, 송정공의 장손이 대가 끊어지고, 익산문중으로 장손이 승계 되면서
송정공 할아버지의 집터가 한산이씨 집안에 팔리게 된다.
이것은 서울에 남아있던 송정공의 후손과 지방으로 낙향한 송정공의 후손사이에 재산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 과정에 누군가 송정공의 재산을 팔아먹은 것이다.
물론 누구인지 알수없다...
1673년 계축보가 창보 되었으나,,,이미 이때부터 송정공의 산소 위치를 밝히지 못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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