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백 시조 할아버지 묘역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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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백 시조 할아버지 묘역 안내판

송은도 0 4335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산27-1에는 진천송씨 시조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다.
그 묘역에는 안내판이 설치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무덤에는 송인(?∼1126년) 선생이 안치되어 있다. 장방형의 호석을 두른 고려시대의 특유한 묘제이며, 조선 후기에 세운 묘비가 2기 있다.

송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진천송씨의 중시조 이다. 벼슬이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이 이끄는 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좌리공신에 추증되었고,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묘역에는 진천송씨 선조 묘소가 여러 기 있으며, 그 앞에는 1993년에 세운 재실이 있으니 [상산재]라는 편액이 있다.

 


위 안내판에 대하여는 예전부터 우리 집안 향토 사학자 낙천 (교하공 문중 병혁)어른께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우리 시조님 묘역에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사에 시조님은 무인 장군으로 이자겸 난에 대항하여 고려 인종을 호위하던 중, 척준경 (이자겸 사돈)에 체포되어 전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가 1126년 이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문신으로 벼슬이 문하평장사로 쓰여있다.
한편, 그 난이 평정되고 좌리공신에 추증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번에도 설명 하였듯이..
시조님이 생존하셨을 당시에는 고려사회에 문관우대 무인천대의 풍조가 극심 하였다.
그래서 무인의 경우 무관이라 부르지 않고, 무부 또는 무인이라 부르며 문관 보다 낮추어 불렀다.
 
이유는, 고려시대에도 문관은 조선시대 처럼 과거시험에 급제한 학자 출신이거나, 5품 이상의 고위직을 지낸 대신의 자손들이 음서로 진출한 권문귀족 신분 들이었다.
 
그에 반해 무인은 문관에 비해 신분의 차별이 덜 하였다. 그래서 꼭 고위직의 자손이 아니고, 평민이나 심지어 노비의 자식들도 무예 능력만 있으면, 무장이 될수 있었는데,
문관 처럼 과거에 의해 등용되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직업적 세습에 의하거나, 평민 중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식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 무인 중에는 글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고려사에 보면 정중부가 무인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정변에 참여한 무인들이 문관의 벼슬까지 차지하게 되는데, 이 무렵 고려사에는 "대부분 글을 모르는 무인들이라, 정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 쓰여 있을 정도이니, 그 당시 무인들의 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알수 있다.
물론, 무인 중에도 정중부, 최충헌의 경우 그 집안이 중앙군인 출신으로 비천한 계층은 아니었다. 사실 최충헌의 경우 그 할아버지가 상장군 출신인데, 음보로 무인에 나가지 않고, 처음에는 과거를 통해 문관으로 나갔다. 그런데, 정중부, 이의민, 이고, 채원 등이 난을 일으켜 무인들이 정권을 잡자, 최충헌은 스스로 갑옷을 입고, 칼을 허리에 차며 무인의 길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외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은 본래 미약한 집안 이었고, 심지어 이의민은 그 부친이 경주 출신 소금장수이고, 모친은 사찰 노비로 신분이 비천하였는데, 경주 사심관의 추천으로 중앙군에 발탁된 후, 훗날 무인정변으로 정권을 잡아, 무인 최고의 벼슬 상장군까지 올랐다.

한편 임연은 본래 평민 출신 이었으나, 중앙군인에 발탈되고 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인물이다.
즉, 고려시대 무인은 꼭 귀족출신이 아니고 신분이 낮은 평민계층도 가능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이 이러다 보니 무관 보다는 문관이 더 존엄하게 느껴졌는지 누군가 시조님 묘역 안내판에 문관으로 고려평장사 벼슬을 지냈다고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분명히 우리 시조님은 평장사 벼슬을 지낸 문관이 아니고, 무관으로 장군 이었다.
 
한편 난이 진압된 후, 좌리공신에 추증되었다고 쓰여있다.
언제가 낙천 어른이 지적 하였는데, 좌리공신은 조선시대 1469년(성종2년) 신숙주, 한명회 등의 신하들이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하였다 하여 공으로 내린 공훈이다.
그런데, 그 보다 몇 백년 앞선 시대에 우리 시조님이 좌리공신에 추증되었다는 것은 세간의 웃음 거리이다.

물론 시조님은 반란군에 대항하여 임금을 보필하시다 전사 하였으므로 좌리공신 보다 더 큰 공신 대접을 받아 마땅한 일이나... 그렇다고 1126년 고려시대에 돌아가신 분인데,,, 그 보다 몇 백년 후 조선시대 좌리공신을 갖다 부치는 것은 웃음거리 이다.
 
만약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안을 소개하며 "나의 할아버지는 조선 정조 임금 때 내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를 지냈다"라고 하거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조판서를 지낸 후, 영의정까지 올랐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저 사람 지금 거짓말 하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좌리공신이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지만,
만약 국사를 전공한 사학도나, 대학교수 또는 사학자가 우리 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찾아와 안내판을 읽었을 경우,,, 그들이 박장대소 하고 웃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공신 명칭을 고려시대 조상에게 부치기 하였으니 "무식한 놈들 이라"고 비웃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상산백"이라는 표현도 엄밀히 보면 잘못 되었다.
황제는 왕을 제후로 임명하여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을 다스리게 하는데,

한편, 백은 왕이 임명한 제후라고 볼수 있다.
즉, 왕으로 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일정지역의 군사 행정 사법을 독자적으로 총괄하여 지휘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제후에 해당하는 백에 해당하는 직위를 하사 받은 사람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숫자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고려시대에 백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고려초에 사심관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태조가 고려를 개국하고 전국에 있는 호족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우며, 호족들의 지위를 보장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세력 아래로 귀합하기 위해 만든것이 사심관 제도이다.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을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녹읍으로 하사하여, 군사 행정 사법권을 총지휘 하는 등 독자적인 권한을 부여해 준 것이다. 그 대신 반란에 대비하여 사심관의 자녀는 중앙에 올라와 볼모가 되었다.
 
이 사심관의 대표로 경순왕 (김부 : 경주사심관)과 이자겸 집안 (인주이씨, 경원이씨, 인천이씨)이 있다. 인주지역은 오늘 날 인천-시흥-화성-당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사심관 제도는 고려왕실이 점차 안정을 차지하고, 왕권이 강화되며 곧 폐지 되었다.
즉 진천백이라는 표현도 어찌보면 근거가 미약하다.        
 
과거 20년 전만 하더라도, 정보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다.
고려사나 조선실록과 같은 고문서를 보려면 국립대학 도서관이나 국립 박물관에나 가야 읽어 볼수 있었고, 일반인의 경우 그나마 제한적으로 열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자기 집안 내력을 다소 뻥튀기 하여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 20년 사이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컴퓨터 단추만 누르면, 인터넷을 통해 고려사, 조선실록 원문과 해설서를 볼수 있고, 그외 해설서도 손쉽게 볼수 있는 세상이 되어, 그 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정보들이 하나 둘씩 발가벗겨지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시조 諱 순공의 신라대아찬 벼슬, 1세조 諱 인 고려평장사 벼슬은 어쩔수 없다.
우리 집안 최초 족보인 1673년 계축보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다소 과장된 표현이 분명하지만,  족보도 기록이고, 우리 조상님들의 의견과 유산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모른척 하고 지나치는 것도 도리일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 분명히 장군으로 되어 있는데, 문관이라고 하거나, 조선시대에나 있었던 좌리공신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옛날 약간 과장한 것을 이제는 한술 더 하여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내판을 아래 내용으로 바꾸면 어떨까.
 

이 무덤에는 송인(?∼1126년) 선생이 안치되어 있다. 장방형의 호석을 두른 고려시대의 특유한 묘제이며, 조선 후기에 세운 묘비가 2기 있다.

송인은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진천송씨의 중시조 이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장군으로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이 이끄는 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나라를 위한 희생과 공적을 후손들이 본받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명문으로 성장하니, 이는 公의 공덕이라 난이 평정된 뒤 사람들에 의해 상산백(常山伯)으로 모셔지고 고려평장사로 추증 되었다.

묘역에는 진천송씨 선조 묘소가 여러 기 있으며, 그 앞에는 1993년에 세운 재실이 있으니 [상산재]라는 편액이 있다.


 
문관이고 고려평장사 벼슬을 지냈으며, 좌리공신에 추증되고, 상산백에 봉해졌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그런데, 우리 집안 1673년 계축보에 고려평장사 벼슬을 지냈고, 상산백에 봉해졌다고 쓰여있으니, 참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있는 사실대로 쓰도록 하며,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족보의 내용도 존중하는 쪽으로 해야할 것이다.
 
문관 고려평장사 벼슬을  무관 장군이라 사실대로 고치고,
좌리공신 추증은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과감히 삭제하고,
상산백에 봉하여 졌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으나, 우리 족보에 쓰여있으니,
이것은  고려 왕실로 부터 추증된 것이 아니고, 그분의 공덕을 높이 기어하고자 후손들과 지역사람들이 상산백으로 모신 것이며, 고려평장사로 추증한 것이라,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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